한원석 작가의 '현영(現影)' |
설치미술 작가들이 스피커를 활용해 작품을 제작하면서 순수미술과 실용 디자인 경계 허물기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스피커를 단순 가전이 아닌 조형적 오브제로 다루며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원석 작가는 폐종이관에 스피커를 넣은 '사운드 포레스트'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스피커를 내장한 종이관에 표면을 검게 옻칠한 '관음'이 대표적이다. 상하로 두 개의 관이 하나의 유닛을 이루며 음악을 재생하고, 여러 유닛이 '소리의 숲'을 형성한다. 전시에서는 작가가 기획한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작품 한 점을 개별적으로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사용할 수 있다. 한 작가는 "오감 중 하나인 소리를 통해 시각예술의 한계를 넘어보고자 했다"며 "보이는 소리이자 들리는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환경 문제를 설교하듯 강조하기보다 버려진 나무들이 다시 하나의 숲을 이루는 모습을 통해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운드 포레스트' 연작 중 '소리 나무'. 유동룡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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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는 종이관 표면을 알록달록한 색종이로 덮은 '파파게노', 폐지와 폐파이프에 스피커를 넣어 나무 모양으로 형상화한 '소리 나무' 등으로 시리즈를 확장했다. 그는 11월 16일까지 부산에서 열리는 '지각의 경계: 검은 구멍 속 사유'전에서도 연작을 선보인다. 한 작가는 앞서 폐스피커 유닛 3650개를 활용해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형태의 황금빛 대형 종 '형연(泂然·Resonance)'을 제작한 바 있다. 검은색 버전의 '현영(現影·Black Silhouette)'은 스피커 3088개를 6176번의 납땜 과정을 거쳐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종 안에는 모든 스피커가 각자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전력을 전달하는 80개의 앰프가 설치됐다. 이 스피커들은 원래 TV 설치용으로 제작됐지만 TV가 얇아지면서 버려진 것들을 활용한 것이다.
루카스 무뇨스 무뇨스의 '사운드 시스템 V - 월E' |
스페인의 설치미술 작가 겸 디자이너 루카스 무뇨스 무뇨스는 자신의 전시에서 사용한 설치작의 합판을 해체하고 재활용해 스피커 시리즈 '사운드 시스템' 연작을 제작했다. 하이파이 오디오 기술과 조형미를 결합한 그의 작품은 디자인과 청각 체험의 경계를 허문다. 또 기능적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운드 시스템 1'은 재활용 섬유패널 등을 흡음재로 활용하고, 2500와트(W) 출력을 3개 채널로 나눠 고음·중음·저음을 정교하게 분리한다. '사운드 시스템 V-월 E'는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주인공인 로봇 '월-E'를 닮은 형태로 제작됐다.
사운드 시스템 시리즈의 모든 구조물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열처리된 나사로 조립된다. 재활용 목재를 사용해 지속가능성을 강조한 디자인 철학이 드러난다. 루카스 무뇨스 무뇨스는 올해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스페인 국가관에 참여하며 도시 폐기물과 재활용 소재를 주제로 한 설치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폴 아구스티의 'Wua-g I Speakers'. 아도르노 디자인 |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폴 아구스티는 남미의 박 종류 '구아헤(guaje)'를 울림통으로 삼아 스피커를 제작한다. 그는 장인적 수공예와 첨단 기술을 결합해 자연과 기술의 경계를 잇는 독특한 사운드 조각을 완성했다. 전통적으로 구아헤는 남미에서 물과 곡식, 씨앗을 담은 그릇으로 사용됐다. 그의 대표작 'Wua-g Ⅰ'과 'Wua-g Ⅱ'는 천연 구아헤 껍질을 가공해 내부에 현대적 음향 시스템을 삽입한 작품이다. 아구스티에 따르면 이 스피커는 단순히 음악을 재생하는 도구가 아니라 땅과 조상의 기억에서 울려나오는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체다.
설치미술에서 스피커를 활용한 작품은 단순한 소리 재생을 넘어 조형미와 공간 경험, 지속가능성, 역사·문화적 맥락까지 아우르는 예술로 발전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갤러리뿐만 아니라 호텔, 상업 공간, 가정에서 사용되고 있다. 작품 수집가에게는 조형적 오브제이자 가전으로 기능하며, 예술적 경험과 실용적 기능을 동시에 제공한다.
[정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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