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김정랑 시인 |
며칠 전 회사 메일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본지와 교보문고가 개최 중인 신인 작가 등단제 '만추문예(晩秋文藝)'의 제1회 시(詩) 부문 당선자 김정랑 시인과 관련된 문의였다.
김 시인은 만추문예 심사위원 정호승 시인, 정과리 문학평론가의 선택을 받아 2023년 11월 시인의 이름을 얻었다. 12월 시상식을 앞두고 먼저 만난 김 시인은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병색의 기운까지 완연해 조심히 여쭤보니 역시 암 투병 중이었다. 초진 아닌 재발. 힘없이 그는 말했다. "전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아요." 간절했던 등단의 꿈을 그는 소멸의 문턱 앞에서 이뤘다.
시간이 1년쯤 흘러 작년 11월, 아주 우연히 김 시인의 부음을 들었다. 발인이 끝난 상이었다. 원고 청탁과 관련해 몇 차례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본인상인 데다 유족들은 기자의 연락처를 모르니 빈소를 찾을 기회가 애석하게도 허락되지 못했다. '결국 돌아가셨구나….' 다시 1년이 흘러 며칠 전 그의 지인이 보내온 메일의 내용은 이러했다. '고인의 유고 시집을 출간하고 싶은데 가족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부모상이나 형제상과 달리 본인상만큼 스산한 작별도 없다. 죽음이 세상에 도달할 경로가 끊어진 완벽한 단절이어서다.
가을이 오면 김 시인의 당선작 '탁설(鐸舌)'이 종종 생각난다. '솔바람이 머슴처럼 월정사 마당을 쓰는 초하루/ 일주문 넘은 수천의 발원들이 수광전에 모인다'란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시는 50년 전 저수지에 빠져 죽은 막내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를 사찰에서 잠깐 스친 화자 '나'의 시선으로 담았다. 비통함과 죄책감으로 어깨가 '폐가'처럼 기운 한 여인, 그러나 50년째 얼음장 밑에서 '단 한 번을 안 나오는' 막내아들. 화자 '나'와 이 여인의 발뒤꿈치가 부딪치는 마지막 묘사가 이 시의 압권이었다. '백팔 배에 졸아붙은 그녀의 뒤꿈치가/ 독경하는 처마 끝 내 뒤꿈치와 부딪친다'란 부분이다. 고통의 전염, 상처의 전도(傳導)를 이야기한 이 시는 정교하게 깎고 다듬은 완벽에 가까운 조탁(雕琢)의 언어였다.
세상에 닿지 못한 본인상 부음과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맞닿고자 하는 의지로 채워진 그의 시는 묘하게도 엇갈렸다.
하지만 육신의 죽음이 허망해 보이진 않는다. 그의 시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아직 세상에 남아 있어서다. 한 사람의 진정한 죽음이란 생물학적 사멸이 아니라 망자가 한때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 시작된다고 했다(엘리 위젤).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한 개인의 '두 번째 생명'을 허락해주며, 한 사람이 생전에 남긴 언어는 타인의 의식 속에 새 생명으로 이식된다. 하지만 단지 시, 언어예술만 그럴까. 산 자의 모든 행위는 사후엔 기억으로 세계에 잔존한다. 이제 우린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죽음은 만인에게 공평하지만 남겨지는 것은 모두 다르다. 김 시인은 '언어'를 남긴 사람이었다. 그렇다. 죽음은 삶의 거울이다.
올해 만추문예는 3회째를 맞았고 곧 최종심 결과가 발표된다. 심사위원들은 수천 편의 투고작을 들여다보며 숙의 중이다. 며칠 뒤 호명될 당선자들이 명성과 성취감 때문이 아닌, '사람은 떠나도 언어는 남는다'는 신념으로 원고를 보냈다고 믿어본다.
시 '탁설'의 제목은 사찰의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인 풍경(風磬) 안의 물고기를 뜻한다고 김 시인은 생전에 말했다. 풍경 안에 갇혀 있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것,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를 내지만 세상의 중심인 무엇이 늘 있다. 탁설은 사라진 시인의 혀를 닮았다. 고인의 숨결은 바람 속에서 세상과 여전히 부딪치고 있다.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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