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 리뷰
가부키를 향한 두 남자의 열정...혈통·세습 향한 비판적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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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는 인간 국보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서로를 뛰어넘어야만 했던 두 남자의 일생일대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상일 감독이 연출을 맡은 ‘국보’는 일본 현지에서 개봉 102일 만에 누적 관객 수 1000만 관객을 넘은 기적으로 눈길을 끌었다. 흥행 수익 164억 엔(한화 약 1544억 원)을 벌어들이며 일본 열도를 뒤흔든 세기의 흥행작이 됐다. 일본에서 자국 실사 영화가 천만 관객을 넘어선 것은 역사상 이번이 두 번째다.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이어 올해 일본 개봉작 두 번째 흥행 기록을 보유 중이다. 올해 일본 영화 대표로 내년 3월 열릴 미국 오스카(아카데미) 후보작으로 출품됐으며, 올해 칸 국제영화제 및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돼 전 세계와 대한민국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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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 감독은 재일한국인으로, ‘훌라걸스’, ‘악인’, ‘용서받지 못한 자’, ‘분노’ 등을 선보이며 일본 영화계를 주무대로 활동해왔다.
‘국보’는 일본의 전통 연극인 ‘가부키’를 소재로 한 영화다. 둘도 없는 친구이지만 가부키의 세계에서 일생일대 라이벌이었던 두 남자 키쿠오(요시자와 료 분)와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 분), 예술을 향한 그들의 집념과 광기를 세밀한 감정선, 아름다운 영상미로 담아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가부키는 노래와 춤, 연기를 가미한 일본 전통 연극으로, 당대 중산층부터 부유층까지 사로잡았던 최고의 유흥거리였다. 가부키는 여성이 참여할 수 없었기에, 연극에서 여성의 역할까지 전부 남자 배우들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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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는 가부키에서 여성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인 ‘온나가타’의 삶을 조명했다. 이상일 감독이 전작 ‘악인’을 마친 후 일본 현지에서 실제 온나가타로 활동하는 배우를 알게 됐고, 그를 모델로 한 영화를 기획하며 지금의 이야기가 탄생했다.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큼 천부적인 가부키 재능을 가졌으나 적통이 아니었던 키쿠오, 일본 최고의 가부키 집안 후계자이지만 키쿠오만큼 뛰어난 재능은 가지지 못했던 슌스케. 영화는 각자 다른 태생적 한계를 넘어 예술 그 자체가 되고자 한 이들의 치열한 경쟁, 운명적 엇갈림, 재회를 거쳐 마침내 최고의 무대를 완성하는 과정을 긴 호흡과 섬세한 연출로 그렸다.
천부적 재능·든든한 배경 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예술 세계의 냉정함, 순수한 예술 정신을 조명해 바이블이 된 작품들은 많다. ‘국보’의 줄거리 역시 영화 ‘아마데우스’나 드라마 ‘정년이’, 만화 ‘유리 가면’ 등 재능을 지닌 천재와 노력형 엘리트 간 숙명적 경쟁을 풀어낸 여러 작품들을 언뜻 연상케 한다. 태생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 하나로 최고의 경지가 된 주인공 키쿠오의 설정은 ‘빌리 엘리어트’가 떠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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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는 여기서 한층 더 깊이 파고들어 일본의 특수한 역사·문화적 배경을 통해 ‘혈통주의’와 ‘세습구조’의 문제까지 건드린다. 오늘날 일본의 발전 및 융성의 기틀이 된 장인정신의 대표적 개념이지만, 개인의 재능보다 적통(嫡統)을 강조한 폐쇄적 집단주의로도 불린 ‘와’(和) 문화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조화, 집단에서의 공존을 중시하는 가치관이다. 태어난 지역과 뿌리를 벗어나지 않는 조화로움. 야쿠자 두목의 아들은 야쿠자가, 가부키 배우 집안의 후손은 아버지를 이어 가부키 배우가 되는 게 당연했고, 그 외 다른 꿈을 꾸는 게 그 시대엔 허락되지 않았다.
가부키는 특히 진입장벽이 높은 예술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도 대대로 가부키 집안의 피를 이어받은 적통자가 아니라면 최고의 배우가 될 수 없다. 주인공 키쿠오와 슌스케의 비극과 엇갈림도 ‘혈통’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극 초반부터 키쿠오의 타고난 재능, 슌스케의 타고난 핏줄 간 경쟁을 정면으로 맞붙인다. 이 대비는 예술을 향한 두 사람의 열정, 경쟁은 물론 ‘가부키’라는 확실한 문화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일본 사회 전반의 세습 구조를 비판하는 기능으로 섬세히 이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지기 힘든 각자의 한계를 서로 질투하는 두 인물의 괴로움과 고뇌 등 감정의 흐름이 음악과 침묵, 클로즈업된 배우들의 섬세한 움직임, 화려한 무대, 불꺼진 무대로 배경을 옮기며 생생히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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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핏줄을 갖지 못한 키쿠오의 딜레마, 이방인으로 그가 받던 주변의 시선이 이 영화를 만든 이상일 감독 본인이 재일한국인으로서 경험한 삶의 궤적, 정체성과도 맞닿아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너(슌스케)의 피를 컵에 담아 벌컥 벌컥 마시고 싶다”는 키쿠오, 아들 슌스케에게 “내 아들인 너는 몸 안에 가부키의 핏줄을 갖고 태어났다”고 격려하는 한지로(와타나베 켄 분)의 말에 무너지는 키쿠오의 모습 등 인물의 감정을 극명히 나타낸 명대사들이 마음을 더욱 울린다.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 등 주인공들은 물론 키쿠오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쿠로카와 소야, 와타나베 켄, 테라지마 시노부 등 배우들의 열연과 앙상블이 적재적소에 정적을 활용한 클로즈업, 때때로 긴 호흡의 카메라 무빙과 어우러져 전율과 먹먹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성별, 얼굴, 소중한 가족, 몸에 흐르는 핏줄을 지워서라도 최고의 배우가 되려 한 키쿠오, 슌스케의 모습을 표현한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의 열연까지 예술의 경지다.
가부키를 잘 알지 못해도 충분히 몰입해 볼 수 있다. 화려한 무대 의상, 아름다운 영상미에 가슴이 시리고, 몸이 부서져도 무대를 끝까지 빛내는 주인공들의 피, 땀, 눈물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국보’는 오는 19일 국내 개봉한다. 175분. 이상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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