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범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대학교 객원교수 |
지난달 31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경주 APEC 'CEO 서밋'에서 던진 '선물'은 한국을 들썩이게 했다. 그래픽처리장치인 GPU(graphics processing unit, 디지털 화상 처리 및 컴퓨터 그래픽스 가속을 위해 설계된 특수 전자 회로) 26만 장이라는 선물이다. 삼성전자, SK그룹, 현대차 각 5만 장, 네이버 6만 장, 그리고 정부에 5만 장을 공급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발언하는 젠슨 황 |
엔비디아에서 개발한 GPU의 마이크로아키텍처인 블랙웰 기준으로 14조 원 규모다. 대통령실은 "GPU 확보량 기준 전 세계 3위"라며 환호했고, 언론은 "AI 3강 눈앞"이라는 헤드라인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 '선물'이 과연 축복이기만 할까?
26만 장이라는 숫자에 가려진 거대한 현실적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막대한 투자는 'AI 강국'이라는 신기루만 좇다가 끝날 수도 있다.
◇ 전력이라는 현실의 벽
엔비디아의 최신 블랙웰 GPU는 칩 하나당 약 1천 와트 이상의 전력을 소비한다. GPU 26만 장이 동시에 가동된다고 가정할 때, GPU 자체만으로도 260메가와트의 전력이 필요하다. 데이터센터 냉각 시스템과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전력(PUE)까지 고려하면, 실제로는 최소 400~500메가와트에 달하는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최신 1.4 기가와트급 원전 1기 설비 용량의 30~40%에 육박하는 엄청난 양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국내 전력 생산 인프라가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최근 발표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에 따르면, 2038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2023년 대비 3배 이상인 7.7 기가와트에 이를 전망이다. 정부의 전망치 자체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이번 GPU 26만 장 도입에 따른 수백 메가와트의 추가 수요는 전력망에 심각한 부담을 안긴다.
전력 문제는 양의 문제만이 아니다. 송전망 구축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서울대가 경기도 시흥캠퍼스에 AI 컴퓨팅센터를 짓겠다고 했다가 전자파 우려를 제기한 주민 반대로 좌초 위기에 놓인 사례가 있다.
수도권 데이터센터 건설 인가를 받은 곳 중 절반 이상이 주민 민원으로 공사가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SK AI 데이터센터' 기공식 버튼 세리머니 |
전력이 부족하면 GPU 26만 장은 무용지물을 넘어 산업폐기물이 될 수도 있다.
◇ 속도, 그리고 '사람'의 문제
AI 반도체 기술은 빠르게 진화한다. 엔비디아는 블랙웰 이후 2026년에는 '루빈'(Rubin)이라는 차세대 아키텍처를 출시할 예정이다. 지금 도입하는 블랙웰이 실제로 가동되는 시점에는 이미 차세대 제품이 나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도입 시기다. 26만 장의 GPU가 언제, 어떤 모델로 공급될 것인가? 초기 물량이 구형 모델이라면 최신 기술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남아있다.
"이 GPU를 활용할 사람은 준비돼있는가?"
하드웨어만 쌓아놓고 이를 다룰 '사람'이 없다면 투자는 낭비가 된다. 단순히 코드를 짜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새로운 모델을 상상하고 설계할 연구자, 26만 장의 GPU를 효율적으로 운영(MLOps)할 엔지니어, 그리고 이 기술을 산업현장에 적용할 도메인 전문가가 절실하다.
GPU 26만 장을 동시에 가동할 '26만 GPU 규모의 프로젝트'와 이를 수행할 '고급 인력'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값비싼 서버실만 임대하는 꼴이 될 것이다.
결국엔 듀얼 트랙 전략이 답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AI 발전이 듀얼 트랙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업은 수익을 내야 하므로 'AX'(AI Transformation)를 중심으로 먼저 치고 나가야 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AI 공장, 현대차의 자율주행 및 스마트 팩토리, SK의 제조 AI 클라우드, 네이버의 엔터프라이즈 AI는 모두 실질적인 비즈니스 가치를 창출하는 방향이다. 이것이 첫 번째 트랙이다.
하지만, 기업의 수익성만으로는 AI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한국형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은 국가적 투자를 통해 진행돼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트랙이다.
정부가 확보한 5만 장의 GPU가 바로, 이 역할을 해야 한다.
왜 한국형 AI 모델이 필요할까? 한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술 종속을 막고 '데이터 주권'을 확립하는 것이다. 지금은 오픈소스 모델을 비롯해 활용할 수 있는 모델이 많지만, 글로벌 기업들이 모델을 더 이상 공개하지 않거나 천문학적인 비용을 요구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AI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되는 시대에, 핵심 기술과 데이터를 외국 기업에 의존하는 것은 에너지 안보만큼이나 위험하다.
또한 속도도 중요하다.
메타는 전 세계 21개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며 매년 55억 달러를 인프라에 투자한다. 구글은 지난 5년간 미국에만 370억 달러를 쏟아부었고, 올해만 95억 달러를 데이터센터 업그레이드에 투입했다. 이들은 수년 전부터 전력 확보, 냉각 시스템, 재생에너지 전환을 선제적으로 추진해왔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GPU 26만 장을 제대로 가동하려면 전력 인프라, 데이터센터 구축, 냉각 시스템, 송전망 모든 것이 동시에 준비돼야 한다. 명확한 로드맵과 빠른 실행이 필요하다.
첫째, 전력 인프라 확충 계획을 구체화하고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SMR(소형모듈원자로) 도입, 재생에너지 확대, 원전 재가동 등 다각적인 방안을 검토하되 '서울대 시흥캠퍼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주민 수용성 확보와 인허가 절차를 신속하게 처리할 '국가 AI 인프라 패스트트랙'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
둘째, 단계별 GPU 도입 일정과 활용 계획을 명확히 해야 한다.
셋째, 인재 양성과 소프트웨어 생태계 구축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GPU는 도구일 뿐 이를 다룰 사람과 시스템 그리고 전략이 핵심이다. 젠슨 황이 던진 26만장의 '선물'은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AI 강국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도 혹은 값비싼 산업 폐기물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호가 아닌 냉철한 준비와 실행이다.
임기범 인공지능 전문가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대학교(aSSIST) 객원교수. ▲ 현 AI경영학회 이사. ▲ ㈜나루데이타 CTO 겸 연구소장. ▲ ㈜컴팩 CIO. ▲ 신한 DS 디지털 전략연구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네이버 연합뉴스 채널 구독하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