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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5 (금)

    사장은 늙고 후계는 없고 성장 멈춰… 중기 1065곳이 회사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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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쏟아지는 中企 매물] 알짜 기업까지 매물로 나와

    조선일보

    창업주 고령화와 후계자 부재, 갈수록 척박해지는 경영·노동 환경이라는 ‘3중고’ 속에 매물로 나오는 중소기업이 늘고 있다. 과거엔 경영난에 빠진 한계 기업이 매물로 나온 사례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흑자 기업도 적지 않다. 사진은 경기도 한 공단 전봇대에 공장의 임대 및 매매 대상자를 찾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모습./조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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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진해에서 30여 년간 정밀 금형 제조 공장을 운영해온 A사 창업주는 요즘 회사를 팔아야 할지 고민하느라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A사는 해외 대기업을 포함한 안정적인 거래처 덕에 연 매출 600억원 안팎을 올려온 알짜 기업이다. 그러나 창업주는 ‘더 이상 공장을 돌릴 자신이 없다’고 토로한다. 그는 “금형 공정은 숙련도가 생명인데 그런 인력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지 오래고, 갈수록 강화되는 안전·환경 규제는 경영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간다”고 했다. 공정 자동화를 검토했지만 150억원에 이르는 투자비는 감당할 수 없고, 자녀들마저 ‘제조업을 왜 물려받느냐’며 각각 다른 첨단 산업 분야로 떠났다.

    경기 시화공단 내 한 산업용 장비업체 B사 대표도 회사를 매물로 내놨다. 생산 라인을 지키던 숙련공들이 60대가 되고 젊은 근로자들은 공단 자체를 기피하면서 공단 생태계가 늙어가는 상황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대재해처벌법·주 52시간제·노란봉투법 등 노동 규제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2세들은 ‘차라리 월급쟁이가 낫다’며 승계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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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업주 고령화와 후계자 부재, 갈수록 척박해지는 경영·노동 환경이라는 3중고에 밀려 매물로 나오는 중소기업이 쏟아지고 있다. ‘이젠 은퇴하고 싶다’며 백기를 드는 창업주가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삼일PwC에 따르면 최근 3년(2022~2024년)간 주인이 바뀐 국내 중소기업은 1065개사, 거래 규모는 35조원에 이른다. 연평균 355개 기업의 주인이 바뀐 셈이다. 현재 후계자를 찾지 못한 중소기업은 21만개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 기업들은 잠재적 매물인 셈이다. 중소기업 M&A 업계 관계자는 “기업을 물려주는 것이 ‘부의 이전’이 아니라 ‘고통의 승계’로 여겨지는 현실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월급쟁이가 낫다” 알짜 중기도 매물로

    특히 과거에는 경영난에 빠진 한계 기업이 주로 매물로 나왔다면, 최근에는 멀쩡한 흑자 기업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점이 심각성을 더한다.

    충북 음성의 산업용 특수 화학 소재 기업 C사가 대표적이다. 연 매출 100억원에 영업이익률이 무려 50%(영업이익 50억원)에 달한다. 수익성만 보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회사다. 하지만 창업주는 최근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촘촘한 환경 규제와 인허가 장벽에 막혀 성장이 3년째 정체됐기 때문이다. 해외 유학파 출신인 자녀 2명도 각각 다국적 기업과 해외 대학을 택했다.

    창업주들은 ‘각자도생’으로 내몰리고 있다. 경북 구미의 자동차 부품 제조사 D사는 매물로 나온 지 5년이 지났지만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연 매출은 500억원대지만, 국내외 납품 단가가 지속 하락해 팔수록 남는 게 없는 구조가 고착된 탓이다. 운전자금과 인건비를 감당하느라 100억원 대출까지 받아 이자 부담에도 짓눌리고 있다. 60대 후반인 창업주의 자녀 3명은 모두 회사를 잇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각자 베이커리 창업, 외식업 등을 택해 이미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매각 시기를 놓친 우량 중기들이 공중분해되면 수십 년의 제조 노하우와 공급망은 하루아침에 소멸하게 된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실장은 “독일과 일본이 중기(中企) 승계 문제를 ‘산업 안보’ 차원에서 접근해 연착륙시킨 반면 한국은 준비 없이 고령화 쇼크를 맞고 있다”며 “뿌리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사라지면 결국 대기업과 국가 경제 전체의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늙어가는 中企, 제3자라도 이어가야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상속세 공제 확대 등으로 승계 여건은 예전보다 좋아졌지만 ‘회사를 도대체 어떻게 더 키울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이 승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부품사 세인아이엔디를 승계한 2세 오원현 대표도 “창업 세대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 수 있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내수 침체 속에서 수출 시장을 뚫고 새 사업 모델을 찾지 않으면 버티기 어렵다”며 “부담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정부는 ‘기업승계 특별법’을 추진하고 있다. 친족 승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기존 지원책을 넘어, M&A를 통한 제3자 승계까지 지원 범위를 넓히는 것이 골자다. 고령 창업주가 기업을 넘길 때 양도세·상속세 공제 혜택을 주고, 인수 자금 보증과 컨설팅을 패키지로 지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중기 관계자는 “노조 리스크가 없고 규제가 덜한 베트남이나 인도 공장을 사지, 왜 한국 공장을 사겠느냐”며 “기업을 하고 싶게 만드는 근본적 개혁 없이는 ‘매물 폭탄’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계에 부딪힌 기업들이 핵심 생산 기지를 폐쇄하는 ‘제조업 엑소더스’도 현실화하고 있다. 화장지 브랜드 ‘돈잘버는집’으로 유명한 제지업계 ‘3강’ 코스닥 상장사 삼정펄프는 오는 31일 핵심 시설인 평택 공장 문을 닫는다. 공장을 세운 지 50년 만이다. 창업주의 대를 이어 2세 경영 중인 이 회사는 3분기 적자를 기록하는 등 경영난이 심화하자 결국 희망퇴직과 공장 폐쇄라는 극약 처방을 택했다.

    중국·인도네시아산 저가 공세와 국내 고비용 구조를 더는 버틸 수 없어서다. 지난 10년간 위생용지 수입량은 5배나 폭증했고, 쿠팡 등 대형 이커머스 PB(자체 브랜드) 상품들이 값싼 수입 원지를 앞세워 시장을 잠식했다. 업계 관계자는 “국산 원지로는 인건비와 전기료조차 감당하기 힘든 구조”라며 “상장사조차 제조업을 포기하는 마당에 일반 중소기업이 승계나 매각을 통해 명맥을 잇기를 기대하는 건 언감생심”이라고 지적했다.

    [장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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