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김신회의 매사 심각할 필요는 없지]
처음 도전한 장작불 피우기
중년이지만 처음일 것은 많다
일러스트=한상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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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이어지는 업무에 제동을 걸 겸, 주말여행을 다녀왔다. 사람 둘, 개 둘의 여행이었다.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펜션은 도착하자마자 너른 잔디밭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숙소를 둘러싸고 알록달록한 단풍과 아직은 푸르른 산등성이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잠깐 심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몸속이 청소되는 듯 맑은 공기는 보너스였다.
동네 산책길과는 다른 냄새에 신이 난 개들은 마당을 이리저리 누비며 탐색에 나섰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피로까지 겹쳐 여행 의욕 따위는 사라진 줄 알았는데, 청량한 자연 앞에 절로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각자 묵을 방을 정해 작은 짐을 내려놓자, 여정이 시작과 함께 끝을 알리는 느낌이었다. 오긴 왔지만 다 귀찮네. 밀린 잠이나 자고,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고 싶다. 몸이 계속 처지고 눈꺼풀은 자꾸 무거워졌다. 커피 한 잔이 간절했지만, 숙소 안에 비치된 커피 머신은 내가 버튼을 누르자마자 고장 났다. 시골 마을에 있는 숙소라 커피를 마시려면 차를 운전해 한참을 나가야 했기에, 모든 걸 내려놓고 내 몸마저 방바닥으로 내려놓기로 했다. 집에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다양한 것에 호기심을 갖고, 새로운 것에 열린 마음을 가져야 덜 늙는다는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겨울마다 남들보다 두세 배 더 늙는다.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 기온이 떨어지면 기분도 하염없이 가라앉기에 유난히 겨울나기가 힘들다. 그럴 때일수록 몸을 움직여야 한다지만 말은 쉽지. 겨울의 나를 보면 인간에게도 동면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언제쯤이면 겨울이 좋아지려나. 아니, 겨울을 받아들이게 될까. 이 여행이 그 시작이 되길 바랐는데 영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숙소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한참 뒹굴다가 마당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불을 피울 수 있는 공간이 보였다. 그 옆에는 두툼하게 팬 장작더미와 불을 붙일 수 있는 도구가 놓여 있었다. 선반 위에는 마시멜로 한 봉지와 기다란 꼬치도 있었다. 이른바 ‘불멍 세트’였다.
소담스럽게 놓인 불멍 세트를 보니 마음이 움직였다. 불을 피우면 따뜻해질 거야. 몸도, 마음도 포근해질지도 몰라. 소파와 하나 된 몸을 일으켜 불 피울 준비를 했다. 야심 찬 움직임에 함께 간 지인이 물었다. “불 피우는 법 알아요?”
“몰라요. 한 번 해보죠, 뭐.”
이제까지 한 번도 불을 붙여본 적 없었지만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바위가 깔린 바닥 위에 장작을 비스듬히 올려두고—영화에서 그렇게 하는 걸 본 적이 있다—불쏘시개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하지만 불은 잠시 붙는 것 같다가도 차가운 날씨 때문인지, 빈약한 기술 때문인지 금세 꺼졌다. 그런데 이 불 붙이기라는 것이 묘하게 도전 정신을 자극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음에도 점점 비장해졌다. 작은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던져 보고, 마시멜로에 불을 붙여 장작 사이로 밀어 넣어 보고, 이렇게 궁리해 보고 저렇게 애써 가며 30분 넘게 씨름하다 보니 장작 사이로 미세한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그때 느꼈던 뿌듯함이란. 봤어요? 불, 붙은 거! 내가 붙였다고요!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캠핑 의자를 깔고 앉았다. 중간중간 기다란 꼬치에 마시멜로를 끼워서 구워 먹었다. 구운 마시멜로를 먹어 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는데 불에 그슬린 마시멜로가 그렇게 달고 부드러운지 몰랐다. 이 맛있는 걸 나만 안 먹고 있었다니!
나머지 시간에는 개를 품에 안고 그저 불을 바라봤다. 음악도, 대화도 없이 한참 앉아 있다 보니 왜 사람들이 불멍, 불멍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잡생각과 고민이 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추위에 굳은 몸과 마음마저 물렁하게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여행에서 한 것이라고는 숨을 헐떡이며 불을 피우고, 불 앞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던 게 다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생각했다. 다음 불멍은 또 언제 하지? 태어나 처음 경험한 불멍에 어느새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자타공인(!) 중년이다. 이 나이쯤 되면 알 것 다 알고 좋은 건 웬만큼 해봤다고 자만했는데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 그 말은 처음일 것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겠지. 겨울의 즐거움을 조금은 알게 해준 짧은 여행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새해에는 어떤 새로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연말이면 이렇게 한 해가 가고 말았다는, 올해도 제대로 해 놓은 게 없다는 생각에 씁쓸해지곤 했는데 내년이 기다려지는 연말은 또 처음이다.
저속 노화가 유행인 시대다. 내년에는 새로운 것에 더 마음을 열고, 다가올 처음을 기대해 봐야지.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속으로 노화할지도 모른다(씨익).
[김신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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