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푹 코트 단지 화재, 아파트 간 최소 간격 불과 7.5m
홍콩 건물 간 법적 최소간격 3m·상업용은 1.5m 그쳐
토지공개념 근거 정부가 소유하고 토지사용권만 매도
의도와 달리 공급 제한돼 집값 부양…'주거 안전' 위협
27일 홍콩 타이포 지역의 왕푹코트 아파트 단지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로 흉물이 된 건물들. 2025.11.27. /AFPBBNews=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24년 9월 어느 저녁, 홍콩 타이포구 홍콩 타이포구 왕 푹 코트(Wang Fuk Court) 아파트의 주민들 일부가 실험에 나섰다. 31층짜리 8개 동 아래 녹지공간에 모여 스티로폼 보드 밑에 담배 라이터를 놓았다. 라이터는 곧바로 불길에 휩싸였다. 주민들은 건물 외벽에 대나무 비계를 설치하는 동안 유리를 보호하기 위해 창문에 스티로폼 판자를 설치하는 계획에 우려를 표했으나 결국 묵과됐다. 건물 보수 감독을 맡은 윌 파워 건축사는 스티로폼이 불법 자재가 아니라며 우려를 일축했다. 1년2개월여 후 홍콩은 역사상 최악의 화재 참사를 맞는다.
블룸버그통신은 현지 주민 12명과 보수 공사 문서를 검토한 결과, 참사를 막을 기회가 수 차례 차단됐다며 이번 화재가 명백한 인재라고 짚었다.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왕 푹 코트 아파트 화재는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도입 이후 수면 아래로 내려간 사회적 분노를 건드렸다. 건물 하층 보호망에 불이 붙은 뒤 창문을 덮었던 스티로폼 스크린으로 번졌고 대나무 비계를 타고 건물 사이로 빠르게 옮겨붙었다. 예견된 재앙이었다.
홍콩 북쪽 해안 톨로 항구 옆에 위치한 왕 푹 아파트 단지는 홍콩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주거 지역은 아니다. 초고층 건물이 워낙 많은 데다 1980년대 초 식민지 정부가 저소득 가정을 위한 주택단지를 도입하면서 입주한 노후 단지이다. 가구당 40~60㎡ 규모의 소형 면적이지만 600만~1000만 홍콩달러(약 11억~19억원)로 홍콩의 평균 아파트 가격(3.3㎡당 1억4300만원)보다 약간 저렴하다. 40년이 넘은 낡은 주거단지이지만, 중산층 이하 가구가 감당할 수 없는 가격대의 주택이다.
2일(현지시간) 중국 홍콩 타이포의 왕푹 코트 아파트 단지 옆에서 열린 화재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하고 있다. 2025.12.02. /로이터=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번 화재로 총 8개 동 중 7개 동에 불이 옮겨붙었는데 동 간 거리는 7.5m에 불과했다. 간격이 가장 넓은 동조차 16m에 그쳤다. 대나무 비계나 폼스크린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바람이 거센 경우 불기둥이 타워를 타고 올라가는 굴뚝 효과가 발생할 만한 간격이다. 보수 공사 자재 문제뿐 아니라 좁은 면적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구조가 재난 시 대형 피해를 불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홍콩은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다. 지난 3월 기준 집값이 전년 대비 6.57% 하락했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빅토리아 하버, 더피크 지역의 고가 아파트는 3.3㎡당 2억원을 초과한다. 2025년 기준 홍콩의 PIR(주택가격/가구 연소득)는 25배로 평균 가구가 연소득을 25년간 모아야 집을 살 수 있다. 서울(약 15배), 도쿄(약 10배), 뉴욕(약 12배)보다 훨씬 높다.
홍콩에는 전세 제도가 없다. 내 집이 없으면 비싼 월세를 감당해야 한다. 홍콩 주민의 평균 월급이 18만925홍콩달러(315만원)인데 원룸 월세로 그 절반 이상을 낸다. 평균 월세는 도심 원룸·스튜디오가 1만2000~1만8000홍콩달러(약 225만~340만원), 일반아파트(방 2~3개)는 2만~4만 홍콩달러(약 375만~750만원) 수준이다. 결국 많은 홍콩 시민들이 '닭장'으로 불리는 초소형 아파트에 거주하고, 방을 공유하거나 공유주택에 산다.
27일 홍콩 왕푹 코트에 위치한 대형 아파트가 화재로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5.11.27/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전문가들은 홍콩의 높은 집값과 이로 인한 주거 불안을 강력한 토지 공급 제한 정책 탓으로 본다. 홍콩은 토지의 장기 사용권을 정부가 독점적으로 관리·판매하는데, 이를 통해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확보하는 대신 세금은 낮게 유지해왔다. 토지 소유권은 정부가 쥐고 사용권만 최고가 경매로 팔다 보니 부동산 개발을 소수 재벌이 독점한다. 집을 지을 땅이 제한되니 공급이 제한되고 결과적으로 정부가 집값을 높게 떠받쳐줬다.
제한된 땅에 최대한 많은 집을 지어 팔다 보니 건물 간 간격도 최소화됐다. 홍콩 법령집 제123장 '건축물 조례'에 따르면 건물 간 최소간격은 높이 15m 이상 건물도 6m에 그친다. 15m 이하 높이의 주거용 건물은 그보다 좁은 3m이고 상업용 건물은 최소간격이 1.5m에 불과하다. 화재 발생 시 안전 대피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토지공개념을 토대로 정부가 토지 공급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면서 빚어진 부작용이다.
홍콩섬 야경 /사진=머니투데이 사진DB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홍콩의 토지공개념은 18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2년 난징조약 이후 영국이 홍콩을 식민지로 삼고 토지 제도를 재편하면서 투기를 막기 위해 토지는 모두 국왕(정부) 소유로 하고 민간에 장기임대권을 부여했다. 중국에 반환된 이후로도 이 틀이 그대로 유지됐다. 야경을 자랑하던 홍콩의 마천루는 지금 시민 안전을 흔들고 있다. 좁은 면적을 다시 칸막이로 나눠 임대하는 '닭장 아파트', 사람 1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건물 간 간격은 이번 일로 큰 화재 불안감을 안긴다.
국내에서도 '10·15 대책'으로 서울 25개 전 자치구와 경기도 상당 지역이 토지거래 허가 구역으로 한꺼번에 묶었다. 집값 과열을 진정하고 투기를 억제하겠단 취지다. 의도는 선량하지만 과도한 규제 부작용도 잇따른다. 대책 후에도 규제가 쌓인 주택 시장에 공급이 늘어날 시그널은 보이지 않는다. 공급이 막히면 결국 주거 '안전'도 위협받을 수 있다. 왕 푹 코트 화재의 교훈이다.
김희정 기자 dontsigh@mt.co.kr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