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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 (월)

    [이광재의 패러다임 디자인]〈20〉AI 주치의 시대 열려면-한국 의료 혁신의 첫 단추는 API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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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신문

    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의료 접근성과 디지털 인프라, 두 축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나라다. 동네 의원에서도 빠르게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전국 어디서나 초고속 인터넷이 당연하게 제공된다.

    그러나 이 두 강점이 만나 만들어야 할 '디지털 헬스케어 혁신'은 아직 본격적으로 열리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의료 데이터가 병원마다 갇혀 흐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병목을 해소하는 첫 단추가 바로 의료 데이터 API 개방이다.

    API가 개방되면 국민은 생애 전 건강을 관리하는 'AI 국민주치의'를 갖게 된다. 지금은 병원·약국·검진센터에 흩어져 있는 의료 기록이 표준 API(FHIR)를 통해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합되고, AI는 이를 바탕으로 만성·심혈관·암 등의 질환 위험을 조기에 예측한다. 개인에게 필요한 식단·운동·수면·생활습관까지 맞춤형으로 제안할 수 있다.

    지방의 의원에서 상급종합병원으로 옮길 때 의료 정보를 다시 설명하거나 CD를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정보가 자동으로 연동되므로 중복 검사나 투약 오류, 위험한 약물 상호작용 같은 문제도 크게 줄어든다. AI 주치의는 결국 국민의 안전과 편의를 높이고 건강수명을 늘리는 기반 인프라가 된다.

    그러나 AI 주치의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는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강력한 신뢰가 필수다. 의료 정보는 그 자체로 민감 정보이며, 특히 정신건강·산부인과·비뇨의학과 등은 유출 시 개인에게 심각한 사회적·경제적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최근 플랫폼 기업들의 대규모 정보 유출 사례는 보안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운다.

    따라서 API 개방은 '무제한적 개방'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융권 이상 수준의 암호화·접근통제·이상 탐지 시스템을 전제로 한 안전한 개방이어야 한다. 데이터 접근 권한을 최소화하고, 사용 내역을 투명하게 기록·감사하며, 국가 차원의 사이버 방어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국민이 “한국의 의료데이터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AI 주치의도 현실이 된다.

    API 개방은 산업에도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스타트업은 병원마다 다른 EMR 구조와 폐쇄적 데이터 환경 때문에 혁신 이전에 '연동 작업'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표준 API가 열리면 기업들은 병원과 손쉽게 연결되고, AI 진단·원격 모니터링(RPM)·멘탈헬스·디지털 치료제·신약개발 AI 등 다양한 혁신 서비스 개발에 집중할 수 있다.

    미국이 API 개방 이후 디지털헬스 투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든 것처럼, 한국도 헬스케어를 국가 성장축으로 삼을 수 있다. API 개방은 단순한 기술 정책이 아니라 헬스케어 선진국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국가적 관점에서도 API 개방은 전략적 기회다. 한국처럼 의료 접근성이 높고 진료비가 합리적이며 IT 인프라가 탄탄한 나라는 드물다. 여기에 국가 단위로 표준화가 가능하다는 강점까지 갖고 있어, 한국은 세계 최초로 국가 단위 AI 의료 플랫폼을 구축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다.

    FHIR 기반 데이터가 전국적으로 통합되면 한국형 AI 의료 모델은 아시아·중동·동남아 등 의료 수요가 급증하는 지역으로 수출될 수 있다. AI 기반 진단·예측·보험심사·원격 모니터링까지 하나로 묶은 '한국형 AI 의료 플랫폼 패키지'가 새로운 수출 산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API 개방이 곧 혁신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첫째, 의료 데이터에는 오류·누락·기관별 기준 차이 같은 '쓰레기 데이터'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품질이 낮은 데이터는 AI 진단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표준화·정합성 관리·품질 인증 체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둘째, 개인정보 보호는 의료 혁신의 전제가 아니라 혁신의 일부이며, 보안 없이 이루는 혁신은 국민 신뢰를 잃는다.

    셋째, AI는 의사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료진의 역량을 강화하는 도구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AI는 영상 판독·약물 상호작용 탐지·고위험군 예측 등 반복적이고 방대한 데이터를 다루는 영역에서 의사를 지원하고, 의사는 복합적인 진단·의사결정·환자 상담에서 본연의 전문성을 더 발휘하게 된다.

    한국 의료의 강점은 '빠른 접근성·높은 품질·의료진의 헌신'이다. AI는 이 강점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활용돼야 한다.

    의료 API 개방은 선택지가 아니라 대한민국 의료 대혁신의 출발점이다.

    국민에게는 AI 기반 국민주치의를, 산업에는 세계 수준의 헬스케어 혁신 생태계를, 국가에는 AI 의료 플랫폼 패권을 가져다줄 수 있는 핵심 인프라다.

    데이터가 안전하게 흐르고, 의료진과 AI가 협업하는 체계가 갖춰질 때 한국 의료는 비로소 세계를 향해 도약할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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