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권형 정치부 기자 |
“보기 싫은 사람을 안 볼 수 있어서 좋다.”
‘미장’(미국 증시) 투자로 ‘파이어(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경제적 독립 조기 은퇴)’한 소위 파이어족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파이어는 일하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는 자산을 모아 40대 내외에 은퇴하는 삶을 일컫는다. 최근 다수 MZ(밀레니얼+Z세대)들의 ‘로망’이자 꿈으로 거론된다. 여행을 다니고 취미 생활을 하는 등 하고 싶은 일로 일상을 채우고 싶다는 것.
파이어의 핵심은 은퇴에 충분한 자산을 만드는 투자에 성공하는 것이다. 근로 소득만으로는 그 정도 자산을 만들기 충분치 않기 때문. 최근 투자 수단으로 급부상한 게 미장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 나스닥100지수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와 슈드(SCHD) 등 배당 ETF를 통해 자산을 연 10∼20% 내외씩 안정적으로 불릴 수 있다고 계산하기 때문. 또 은퇴 후 현금 흐름을 유지하기에 유용하다고 여겨진다.
이는 수년간 ‘박스피’를 벗어나지 못하는 ‘국장’(국내 증시) 투자, 비교적 많은 자금이 필요하고 ‘갭 투자’(전세 끼고 주택 매입)가 어려워진 부동산 투자 대신 파이어족 꿈나무들이 택한 동아줄이다.
최근 환율 급등의 원인으로 서학개미를 지목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에 대한 여론의 반발에는 이 같은 서학개미들의 존재가 있다. 물론 2, 3배 레버리지 상품 투자,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 주식’ 투자 등 투기성 투자를 하는 서학개미들도 있다. 다만 파이어족 꿈나무처럼 미래를 계획하고 체계적으로 투자하는 서학개미도 있는 것. 이들은 현재 250만 원을 초과하는 연간 양도차익에 세율 22%를 적용하는 해외주식 양도소득세의 강화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파이어족 꿈나무들이 왜 늘고 있느냐다. 파이어족은 그냥 놀기보다 유튜브, 블로그를 하거나 집필, 강연을 하는 등 프리랜서 일로 부수입을 만들곤 한다. 즉 실상 파이어란 일을 안 한다기보다 기업이나 기관 등 조직 생활을 안 하는 것이다. 만족스럽지 않은 근로 소득을 받으려 사람에게 치이는 게 싫고, 비위를 맞추는 게 힘들다는 것이다.
결국 파이어족 꿈나무 증가는 우리 사회가 근로자들에게 조직 생활을 해야 하는 동기 부여, 인센티브 제공에 실패한 결과로 풀이된다.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했고, 일하기 좋은 기업 문화를 만들지 못한 것. 중소기업을 비하하는 ‘X소’라는 표현은 계속 쓰이고 있다. 연봉에 근로자의 능력을 반영하는 직무급제 도입은 진척이 없다.
한창 생산성 높은 30, 40대의 노동시장 철수는 국가 경쟁력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586세대 등 중장년층이 수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포퓰리즘 정치가 MZ들을 예비 파이어족으로 내몬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MZ들은 정년 연장 과정을 매서운 눈초리로 지켜볼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AI) 관련 새로운 산업이나 기존 산업의 인공지능 전환(AX)에서 생기는 혁신이 기성세대의 이해관계로 좌초하는 일이 생긴다면 파이어족 꿈나무는 대거 늘어날 것이다.
조권형 정치부 기자 buz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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