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종 사회부장 |
“비상계엄을 통해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지켜낼 것입니다. 반국가 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습니다.”
12·3 비상계엄 선포 1년을 맞은 3일 오후 10시 27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한 청년이 단상에 올라가 비장한 표정으로 휴대전화 속 텍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정확히 1년 전 같은 시각 윤석열 전 대통령이 발표한 비상계엄 선포 담화문을 그대로 낭독하는 퍼포먼스였다. 일대에 모인 400여 명은 박수를 치며 복창했다. 같은 시각,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에도 사람들이 몰려 “부정선거가 진짜 내란”이라고 소리쳤다. “짱깨 꺼져” 같은 중국인 비하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1년 전 같은 이유로 계엄군은 선관위 청사를 점거했다.
계엄 1년, 더 뚜렷해진 사회 극단화
많은 이들에게 이런 행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됐고 현재 구속된 상태다. 부정선거가 없었다는 팩트도 차고 넘친다. ‘이상한 사람들이니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계엄 1년을 곱씹어 볼수록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기보단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핵심 과제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계엄 1년을 맞아 진행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치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라는 응답이 80%에 육박했다. 1년 내내 겉으론 통합이 강조됐지만, 실제로는 사회 곳곳에서 혐오와 차별, 갈등과 극단화가 부추겨졌다는 것이다. 특히 10, 20대 등 미래세대를 중심으로 극단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지난달 서울의 한 고등학교 축제에선 초대된 래퍼가 무대에서 ‘윤 어게인(again)’을 외치자 학생들이 환호해 논란이 됐다. 다른 학교 축제에서 퀴즈쇼 진행 중 ‘가장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운동을 고르라’는 질문의 선택지로 3·1운동, 5·18민주화운동 등이 제시돼 학교 측이 사과문까지 발표했다.
교사들은 ‘OO충’ ‘페미Ⅹ’ 등의 혐오를 드러내는 학생들 대화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고 우려한다. 한 유튜브 채널이 만든 노무현 전 대통령 조롱 노래가 확산되자 노무현재단이 법적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투표용지를 접으면 자동으로 특정 당이 찍힌다’는 식의 부정선거 음모론 역시 밈(meme) 행태로 여전히 확산 중이다.
‘정의로운’ 못지않게 ‘통합’에 무게 둬야
‘그냥 웃기니까 본 건데 정색하지 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혐오, 음모 등이 유머나 밈과 결합하고,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을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극단주의 정서가 내면화될 수 있다. ‘숏폼 콘텐츠’(94%)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얻는다는 10대들의 경우 특히 그렇다.
과거 극단적 주장이 전문가와 언론의 게이트키핑으로 걸러졌다면, 온라인 환경에선 중립적 합리적 내용보다 분노나 분열 등 자극이 강하고 검증되지 않은 콘텐츠가 더 쉽게 전파된다. 입시 취업 등 경쟁을 최우선시하는 사회 풍토와 여기서 낙오한 젊은 세대는 박탈감→분노→책임 전가 등을 거치면서 쉽게 극단주의 포퓰리즘에 빠지게 된다는 분석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를 개선해야 할 정치권이 오히려 진영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딴지일보와 김어준, 전한길과 극우 유튜버 등을 업고 강경 노선 일변도를 취하고 있는 여야 대표가 그 예다.
계엄 선포 담화문을 낭독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계엄 후 더 악화된 우리의 병폐가 투영된 결과물이 아닐까. 갈등을 대화와 합의 등 민주적 방식으로 풀기보단, 상대를 없애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극단화를 통해 지지층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풀려 했으니 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계엄 1년 특별성명에서 ‘정의로운 통합’을 강조했다. 계엄 책임자 단죄, 즉 ‘정의로운’에 방점을 둔 것으로 들렸다. 1년간 극단이 더 심해진 우리 사회를 위해선 ‘통합’에도 무게를 둬야 한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