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혁명 시대의 관건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최근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 “인공지능(AI) 혁명 시대에는 에너지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며 “한국의 결정적 약점이 에너지”라고 조언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최신 보고서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전력 인프라에 대한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8일 IEA의 ‘한국 에너지정책 리뷰’에 따르면 한국은 주변국과 전력망이 연결되지 않은 전형적 고립계통(isolated grid)이다. 유럽처럼 국경을 넘어 전력을 사고팔 수 없다. 태양광·풍력 등 변동성 설비가 늘수록 전력 공급·수요 불균형을 국내에서만 감당해야 해 계통 안정성 비용이 커지는 구조다.
지형적 제약도 뚜렷하다. 한국은 남북으로 길고 동서 폭이 좁아 동일한 시간대에 해가 뜨고 진다. 넓은 국토의 미국·호주처럼 태양광 발전 시간대 분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이며 인구 밀도가 높아 재생에너지 설비 부지를 확보하기 쉽지 않고, 풍력의 경우 산림 훼손·경관 논란, 군 레이더 간섭, 조류 충돌, 소음 민원 등으로 사업 지연이 반복된다. 송전선로 건설 역시 환경영향평가와 주민 반발, 보상 갈등으로 착공까지 수년이 걸린다. IEA는 이를 한국 특유의 ‘입지·지형·정책적 병목’으로 규정했다.
IEA는 이러한 조건이 재생에너지 보급 속도와 계통 신뢰도를 동시에 제약한다고 분석했다. 같은 설비를 도입하더라도 한국은 물리적 조건과 사회적 수용성이 모두 낮아 비용이 더 들고 속도는 더딘 구조라는 것이다. 손 회장이 한국과 일본을 “지리적·구조적으로 에너지 확보가 어려운 나라”라고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 회장은 특히 한국이 AI 기술과 반도체에서는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지만, 이를 떠받칠 전력은 ‘약한 고리’라고 지적했다. 초인공지능(ASI) 시대에 필요한 에너지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AI 3대 강국’ 목표도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더해 전력 시장 구조의 제약도 문제로 꼽힌다. 한국전력이 발전 자회사부터 송전·배전·소매까지 사실상 지배하는 가운데, 정부는 규제요금 체계로 소비자 요금을 관리해왔다. 상대적으로 낮은 전기요금이 유지된 대신, 전력회사 입장에선 투자 유인이 약해졌다. 한전 부채는 200조원을 넘어섰다.
IEA는 해법으로 전원(電源) 다변화와 시장 개혁을 제시했다. 원전·재생·수소·ESS 등을 결합한 ‘탄소프리 포트폴리오’ 구축, 전력·가스·수소를 통합 관리할 독립 규제기관 신설, 재생에너지·송전선·수소 인프라 입지 갈등을 줄이기 위한 국가 차원의 공간계획 도입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정부의 전원 믹스 방향은 여전히 모호하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 의지를 밝혀왔지만, 대규모 AI 전력 수요를 감당할 원전 등의 확대 여부는 불확실하다. IEA는 원전을 한국의 에너지안보·탄소중립의 핵심축으로 규정하고 SMR 실증단지를 제안했지만, 정부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포함된 신규 원전 2기마저 다시 공론화 대상에 올려 정책 일관성 논란을 키우고 있다. 최근 착수한 12차 전기본에서 원전 건설이 백지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문주현 단국대 에너지공학과 교수는 “재생에너지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필요 순간에 전기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다”며 “AI·데이터센터 등 투자 계획을 세운다면 전력·냉각용수 같은 기반 인프라까지 함께 제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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