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2 (금)

    ‘암 유전자 정자 기증’에 유럽 발칵…“최소 197명 태어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기증자에 암 유발 돌연변이 유전자…뒤늦게 인지

    발병 확률 90%…태어난 아이 일부 이미 숨져

    동아일보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암 유발 위험이 매우 큰 유전자를 지닌 줄 모른 남성이 기증한 정자가 유럽 전역에서 최소 197명의 아기 출생에 사용된 사실이 유럽 14개 공영방송 합동 조사에서 밝혀졌다.

    문제의 정자로 태어난 아이 중 일부는 이미 암으로 사망했으며, 해당 유전자를 물려받은 대다수 아이는 평생 암 발병 위험이 매우 크다고 유전학자들은 우려했다.

    BBC, DW 등 유럽 주요 언론에 따르면, 이 남성은 본인이 희귀 유전자 돌연변이를 가진 사실을 모른 채 학생이던 2005년부터 정자를 기증했다. 이후 17년 동안 여러 국가에서 그의 정자가 난임 치료에 사용됐다.

    기증자는 건강했고, 유럽 정자은행(European Sperm Bank) 기증자로 등록할 때 기증자 검사도 문제없이 통과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도 전 그의 일부 세포에서 DNA 돌연변이가 발생했다. 돌연변이는 TP53 유전자에 생겼는데, TP53은 우리 몸의 세포가 암세포로 변하는 것을 막는 핵심 유전자다. TP53 돌연변이는 리-프라우메니 증후군(Li-Fraumeni syndrome)이라는 희귀한 유전질환을 유발한다. 이 증후군이 있는 사람은 평생 약 90%의 확률로 암이 발생한다. 특히 어린 시절 각종 소아암과 성인이 된 후 유방암 발병 위험이 매우 크다.

    기증자의 신체 세포 대부분은 정상 TP53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자의 최대 20%가 TP53 돌연변이를 포함하고 있었다. 해당 변이가 있는 정자로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신체의 모든 세포에 돌연변이 유전자를 지니게 된다. 이게 바로 리-프라우메니 증후군이다.

    암 유전학자인 클레어 턴블 런던 암연구소 교수는 “끔찍한 진단이다. 가족에게는 평생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라고 BBC에 말했다.

    이 증후군이 있는 사람은 매년 전신 MRI, 뇌 MRI, 복부 초음파 검사가 필요하며, 여성은 유방암 위험 때문에 젊은 나이에 유방 절제술을 선택하는 예도 많다.

    이번 사건은 기증 정자와 관련된 암 사례에 주목한 의사들이 지난 5월 열린 유럽 인간 유전학회(ESG)에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드러났다.

    당시 동일인의 기증 정자로 태어난 사실이 확인된 67건 가운데 23명이 TP53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 10명은 이미 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조사를 맡은 유럽방송연맹(EBU) 탐사 저널리즘 네트워크에 참여한 기자들의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14개 국가에서 최소 197명의 아이가 이 남성의 기증 정자로 태어난 사실이 확인됐다. 하지만 그중 얼마나 많은 아이가 실제로 돌연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아직 자료 확보가 안 된 국가도 있어 실제 수는 더 많을 수도 있다.

    문제가 된 정자는 덴마크에 본사를 둔 유럽 정자은행에서 14개국 67개 생식의학 클리닉에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각 국가는 나라별로 한 기증자의 정자를 사용할 수 있는 횟수에 관한 규정이 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동일 기증자의 정자 사용을 제한하는 법은 없다.

    유럽 정자은행은 해당 정자의 ‘과도한 사용’을 인정하며, 영향을 받은 가족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했다. 은행 측은 또한 “해당 돌연변이는 기존 선별 검사로는 발견할 수 없는 유형이었으며, 문제가 드러나자 즉시 기증자를 차단했다”라고 밝혔다.

    박해식 기자 pistols@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