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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의 입장에서 입장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이 영화를 끌어안을 수 있는가? 두 번 볼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라는 질문 앞에 섰을 때다. ‘고당도’라는 알 듯 말 듯 한 제목의 영화가 내 앞에 당도했을 때 그러한 선택의 순간에 놓였다.
영화 속 상황은 황당하다. 시골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선영은 수년 전 연명 치료 의사를 밝히지 않고 뇌사 상태에 빠진 아버지를 혼자 수발해 왔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꿈꿀 여유도 없이 의식 없는 아버지를 오랜 시간 돌보면서 그녀의 삶은 피폐해졌다.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그녀의 삶은 피폐했는지 모른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파리하다. 의식 없는 아버지를 돌보다 보면 이게 내 아버지가 맞는지 싶고 내가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됐는지 자괴감이 든다. 사채업자에게 쫓겨 집도 없이 아내와 아들을 끌고 전국을 떠도는 남동생 일회를 생각하면 가슴은 더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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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아버지의 연명 시간마저 다해 가고 의사는 임종을 준비하라 말한다. 연락이 닿아 병원에 온 일회의 상황은 기가 막힌다. 그나마 애지중지하는 조카 동호가 악조건 속에서 의대에 합격한 것이 기특해 등록금이라도 마련해주고 싶지만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돈이 원수다. 핏줄보다 센 돈 때문에 이 가족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가족에 대한 원망. 가족으로 인한 고통. 그 비극은 2대, 3대를 거쳐 대물림 중이다. 그런 와중에 일회는 아버지의 죽음에 앞서 ‘조금 일찍!’ 장례를 치르자는 황당한 제안을 하고 우연과 극한 상황이 겹쳐 이 황당한 제안은 현실이 되어버린다. 이게 가능한가? 가짜 장례식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치른다는 것이?
어이없지만 두 번의 가짜 장례식이 치러진다. 이 황당한 막장극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수긍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힘이다. “내가 미쳤지” 하면서도 극한 상상을 실행하는 인물들에게는 절박함이 있다. 주어진 상황 속에 본능적으로 뛰어다니는 인물들의 모습에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고통과 절박한 욕망이 묻어난다. 이 가족의 고통의 근원은 돈이다. 조금만 사정이 나은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들의 갈등과 고통이 이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서로를 원망하면서도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함께 그 지옥을 건너려 바둥거린다. 고난의 순간마다 삶에 지쳐 외면해온 서로를 향한 연민과 애정이 언뜻언뜻 보인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 앞에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심정적으로 이해되고 영화는 수용 가능한 것이 된다. 영화는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해 웃음과 연민을 동시에 안긴다.
여전히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아버지를 중앙에 놓고 온 가족이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는 마지막 장면에는 진한 감정이 묻어난다. 지독한 폭풍우가 지나간 뒤 일회가 사온 떨떠름한 감을 한입씩 베어 무는 이 가족에게 감은 어떤 맛이었을까? 떫은맛 속에서도 은은한 달큰함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맹수진 영화평론가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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