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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3 (토)

    [이지현의 미술래잡기] 제국이 무너져도 산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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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토머스 콜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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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영화 시작 전, 제작사 로고가 등장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적어도 앞으로 한두 시간 동안은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리라는 믿음을 주던 순간이었다. 유난히 기억에 나는 두 개는 홍콩의 골든하베스트 로고와 미국의 파라마운트 로고.

    1980~1990년대 홍콩영화를 좋아했던 필자에게 골든하베스트는 당연하지만,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사 중에 유독 파라마운트 로고가 뇌리에 남은 것은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설산이 어디일까 궁금했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지금 검색해보니 많은 이들이 스위스의 마터호른 산으로 여긴 것과 달리 미국 유타의 산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조금씩 변모해 온, 사실은 실존하지 않는 상상 속의 산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진짜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의 다른 뉴스에 비해서는 비중이 작지만, 2025년 12월 파라마운트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총성 없는 전쟁도 난리다. 스트리밍 제국의 황제 넷플릭스가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하며 시작한 영토 확장은 며칠 후 파라마운트가 즉각 워너브러더스 전체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선언하며 대전 양상으로 변모하였다. 넷플릭스는 워너의 알짜배기인 영화 스튜디오와 HBO 케이블 채널만 손에 넣어 제국의 완성을 노리고 있고, 반면 파라마운트는 덩치를 키워 생존하려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21세기 문화계 삼국지를 관전하면서 19세기 미국의 풍경화가 토머스 콜이 캔버스 위에 남긴 이야기가 떠올랐다. 유구한 문화역사를 가진 유럽에서는 미술사를 기반으로 발전하는 미술이 가능하지만, 미국에는 그 대신 숭고한 대자연이 있음에 주목하기 시작한 미술가들은 19세기 말에 허드슨 강 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압도적인 산과 광활한 숲을 통해 변치 않는 자연이 인간의 오만을 꾸짖고 역사의 흥망성쇠를 감시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그려내었다. 그런 철학이 극적으로 집대성된 작품이 바로 1836년에 콜이 만든 5부작 '제국의 추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자연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전된 '원시적 상태'와 '목가적 상태'에 등장하는 산봉우리는 우리가 파라마운트 로고에서 본 듯한 구름 위 산 정상의 장엄함을 보여준다. 영원할 것만 같던 황금빛의 화려한 세 번째 작품 '제국의 완성'과 대비되며, 온 도시가 화염과 연기에 휩싸여 약탈당하는 네 번째 '파괴'는 그 처절함이 더해진다. 그런 전쟁의 풍경이 저 수려한 산 주위로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 안에서 막대한 현금을 벌어들이던 파라마운트 같은 기존 영화 산업의 기반이 무너지는 오늘날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고 해도 그렇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실 콜은 이 연작에서 19세기 말 제국주의와 산업화의 탐욕이 결국은 파멸로 향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 연작의 진짜 주인공은 문명의 흥망성쇠가 아니라 반복해서 꿋꿋하게 등장하는 배경, 바로 저 멀리 서 있는 산이다. 원시림 뒤로 보이던 그 뾰족한 산은, 제국이 완성되어 대리석 건물이 시야를 가릴 때도, 전쟁으로 도시가 불탈 때도, 심지어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마지막 작품 '황폐'에서 무너진 기둥 사이로 달빛이 흐를 때도 꼿꼿하게 남아 인간세계를 굽어본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완벽하고 압도적인 자연의 모습으로서의 파라마운트 로고를 다시 보게 된다. 하루가 다르게 인간이 세운 기업과 제국은 주인이 바뀌고 이름이 지워지지만, 허드슨 강 화파가 추구했던 대자연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영속한다. 지금의 전쟁이 끝나면 넷플릭스가 워너를 삼켜 절대군주가 될 수도, 파라마운트가 다시 옛 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든, 그 결과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매체로서 영화의 영속이지, 오직 편하게 블록버스터만 보고 싶은 게으름과 편리함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소란스러운 풍경 뒤로, 정신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에도 고고하게 말없이 서 있는 저 산의 영원한 침묵에 다시 한번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날이다.

    매일경제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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