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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9 (금)

    [문지혁의 슬기로운 문학생활] [21] 기적의 시작은 하루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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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12월 25일, ‘조이 럭 클럽’의 감독 웨인 왕의 샌프란시스코 집에 구독하던 ‘뉴욕타임스’가 배달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별일 아니었지만, 웨인 왕은 굳이 집을 나서 동네 가게에서 신문을 샀다. 걸프전이 임박했다는 기사 외에 특별한 뉴스는 없었던 그날 신문에서 대신 그는 성탄 특집으로 실린 짧은 소설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 읽자마자 아내에게 물었다. 대체 폴 오스터가 누구야?

    조선일보

    “브루클린에 산 지 28년 반이 됐다”며 뉴요커의 감성이 담긴 소설을 써온 폴 오스터.


    작년에 세상을 떠난 폴 오스터는 미국의 소설가로, 그해 성탄절에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단편을 뉴욕타임스에 실었다. 브루클린의 작은 시가 가게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 에세이 같은 짧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허구와 진실의 경계에 관해 묻는다. 다음 해 봄 뉴욕으로 폴 오스터를 찾아간 웨인 왕은 그를 설득해 영화를 만들고, 소설가가 시나리오를 쓴 이 작품은 199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다. 영화 ‘스모크’가 만들어진 사연이다.

    시가 가게 이야기에 ‘스모크’라는 제목이 붙은 건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오스터에 따르면 ‘연기’란 이야기 자체이기도 하다. 흐릿하고 항상 모양이 변하며 신호를 보내고 공중을 떠다니는 것. 진짜인지 가짜인지 독자를 혼동하게 했던 소설은 이후 ‘영화 같은’ 과정을 거쳐 영화로 재탄생한다. 이 뒷이야기가 본래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고 말하면 그건 칭찬일까, 아닐까?

    어떤 실화는 이야기보다 아름답다. 그것은 현실이 이야기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이야기라는 뜻일 것이다. 연기처럼 종잡을 수 없는 하루하루를 애써 붙잡고 연결해서 우리는 삶이라는 서사를 만들어낸다. 기적이란 이야기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올 성탄에는 마구간처럼 볼품없는 우리의 일상에도 저마다 빛나는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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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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