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드라마 '당신이 죽였다'의 은수·희수
편집자주
정신건강의학과 김지용, 오동훈, 허규형 전문의가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우리의 마음도 진단합니다.넷플릭스 드라마 '당신이 죽였다'에서 은수(전소니·왼쪽)는 친구 희수(이유미)를 가정폭력의 굴레에서 구하기 위해 가해자인 남편을 죽이자고 제안한다. 넷플릭스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23만6,647건의 가정폭력이 경찰에 신고되었다. 신고되는 것만 매일 648건이니, 드러나지 않은 폭력들은 얼마나 많을까. 가정폭력을 과거 시대상의 잔재 정도로 여기는 이들도 많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가정폭력 신고건수는 2020년대 들어서도 매년 증가 중에 있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당신이 죽였다’에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간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정폭력 장면이 순간순간 등장했지만, 이만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없었다. 은수(전소니)는 가장 친한 친구 희수(이유미)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자신을 멀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찾아간다. 그리고 행복한 결혼생활 중인 줄 알았던 희수가 남편으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다.
공포의 굴레 속 ‘학습된 무기력’
넷플릭스 드라마 '당신이 죽였다'에서 희수는 남편의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면서 점점 희망을 잃어 간다. 넷플릭스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도움을 주고픈 은수의 간절한 마음과 달리, 희수는 자꾸만 도움을 거절하고 숨는다. 시청자들에게도 의아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다. 나오면 되는 걸 왜 안 해? 촉망받는 동화작가였던 희수가 기존의 인맥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사람들을 적극 구할 수 있지 않나? 글이나 방송으로 상황을 적극 알리면 안 되나?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극히 사실적이다. 피해자의 심리적 특성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매우 정확하게 그려냈다.
반복되는 폭력은 사람을 바꾼다. 그 사람의 뇌를 바꾼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개를 이용한 실험으로 ‘학습된 무기력’ 현상을 발견했다. 전기 충격을 주고 바로 해방시키는 1번 그룹, 충격이 가해지지만 버튼을 누르면 멈출 수 있는 2번 그룹, 버튼을 눌러도 멈출 수 없는 3번 그룹으로 개들을 나누었다. 이후 그 모든 개들을 새로운 상자에 넣고 전기 충격을 가하자 1번과 2번 그룹은 장벽을 뛰어넘어 피했는데, 3번 그룹의 개들은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통제 불가능한 고통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해도 결과가 바뀌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뇌 회로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에게서도 동일하다. 불안과 공포 반응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스트레스 시스템은 과활성화되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전전두엽의 기능은 저하된다. 결국 가정폭력 피해자는 도망쳐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이 생겨도 몸이 반응하지 않고, ‘도망쳐도 결국 더 큰 벌을 받게 될 거야’라는 자동화된 예측에 발목을 잡힌다.
넷플릭스 드라마 '당신이 죽였다'에서 희수를 폭력으로 옥죄는 남편 노진표(장승조). 넷플릭스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희수의 남편 노진표(장승조)는 폭력을 저지른 다음 꼭 예쁜 액세서리를 선물하며 안아준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 모습 역시 실제 가정폭력 현장에서 자주 관찰되는 현상이다. 가해자가 자신의 마음속에 약간이라도 생길 수 있는 죄책감을 지우기 위한 이기적 의도이지만, 동시에 피해자를 더 옭아매는 효과도 지니고 있다. 이렇게 공포 자극과 보상 자극이 교대로 주어지는 상황은 뇌에 혼란을 준다. 공포에 질려 있을 때 주어지는 애정 행동은 피해자의 뇌에서 도파민과 옥시토신 호르몬을 분비시키며 안도감을 준다. 뇌는 ‘폭력 뒤에는 그래도 애정이 온다’는 잘못된 학습을 하게 되며, 이 과정이 반복될 때 결국 공포와 애착이 결합된 ‘트라우마 결속’이 만들어진다.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 보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강한 심리적 의존성이 형성된다. 그럼에도 가해자의 폭력적인 모습과 따뜻한 모습을 통합하기 힘든데, 그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생각들을 추가한다. ‘원래 착한 사람인데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래도 나를 사랑하긴 하잖아’ ‘내가 잘못했기 때문 아닐까? 내가 좀 더 잘하면 폭력이 없을 거야'.
희수 역시 이 과정들을 거치며 희망을 잃었다. 처음에는 저항도 했다. 용기를 내어 신고도 시도했지만 하필이면 경찰에 근무하는 시누이에게 그 기회가 차단당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외국으로 도주하는 선택지까지 고르지만 홀로 남은 어머니를 인질로 잡은 남편의 악마성을 이길 수 없었다. 희망 없는 현실 속에 자신이 잘하면 남편이 때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 전형적인 만성 폭력 피해자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렇게 잘못된 믿음으로 버티려는 자신 앞에 등장한 은수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은 반갑다기보다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 손길을 잡았다간 결국 더 맞을 테니까.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균형마저 무너져 내릴 수 있으니까.
폭력을 목격한 사람의 트라우마
너무도 암울한 상황 속 결국 자살을 시도하는 희수에게 은수가 말한다. “죽여버리자, 네 남편.” 당연히 살인은 모든 면에서 쉽지 않다. 완전 범죄의 실현 가능성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마음속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렵다. 그렇게 힘든 길을 서로 의지하며 걸어가는 두 주인공의 서사가 엄청난 스릴 속에 펼쳐진다. 그런데 왜 도망치지 않았냐는 의문에 이어 또 다른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무리 극한의 상황에 몰렸고, 친구를 돕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더라도 어떻게 살인을 선택할 수 있지?
넷플릭스 드라마 '당신이 죽였다'의 은수 엄마도 남편의 폭력을 견디며 살아왔다. 부모 사이의 폭력을 목격하며 자란 은수는 공포와 분노,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넷플릭스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는 은수의 심리적 요인 때문이다. 희수뿐 아니라 은수 역시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아버지의 폭력을 보면서 자라왔다. “너를 직접 때린 적은 없어. 그런데 대체 무슨 트라우마라는 거야?” 진료실에서 만난 내담자들에게 자주 전해 듣는 말이다. 자신의 우울과 불안이 어디서 왔는지 탐색하다 어린 시절의 가정폭력에서 답을 찾게 되는 이들이 많다. 이를 부모에게 말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이 위와 같은 경우가 잦다.
하지만 가해자들의 변명과 달리, 아이들의 뇌는 부모 사이의 폭력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입는다. 공포 속에 불안한 뇌가 형성된다. 피해자를 돕지 못하고 가해자에게 순응할 수밖에 없던 자신에게 죄책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가해자 역시 내 부모이기에 마음 놓고 미워하지도 못한다. 마음속에 엄청난 분노를 억압한 채 자라난다. 이렇게 은수의 마음속에 잔뜩 쌓여 있던 감정들이 자신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의 트라우마를 함께 겪는 상황 속에서 터져 나왔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죄책감, 가해자에 대한 분노의 감정들이 재경험되었다. 그 가운데 내린 살인의 결정은 친구를 구하기 위함이나, 동시에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불편한 고발 마주하는 용기를
'당신이 죽였다'는 공개 2주차에 넷플릭스 공식 시청 순위 집계 사이트 '투둠'에서 비영어 시리즈 부문 글로벌 1위에 올랐다. 투둠 홈페이지 캡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 드라마는 큰 흥행을 거뒀다. 수많은 작품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에 넷플릭스 글로벌 1위 자리에 올랐다. 안타깝고 슬프게도 이 가정폭력이란 주제에 그만큼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막상 이 드라마가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에 비해 반응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 일견 의아하기도 하다. 보통 글로벌 1위 작품들은 그 명성을 업고 국내에서도 더 널리 퍼지고 더 길게 소비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여기에도 심리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전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심리 방어기제로 억제, 합리화, 회피가 순서대로 뽑힌 바 있다. 어떠한 감정이나 내적 갈등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편해지는 상황이 오면 그 감정을 인정하고 표현하기보다는 의식적으로 참고(억제), 핑계를 대고(합리화), 눈을 돌려버린다(회피)는 것이다. 직접적인 갈등은 피하고 참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온 사회문화적 특성 속에서 만들어진 성격이고,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성격에는 장단점이 동시에 있으니까.
하지만 가정폭력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단점이 두드러진다. 당사자나 목격자 모두 적극적으로 신고하기보다는 참고, 가정 내에서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며 합리화하며 눈을 돌려버린다. 이런 특성이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축소하고, 피해자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게 만들며, 수사기관이나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스스로를, 가족을, 이웃을 지키지 못하고 눈감는 죄책감을 무의식 깊은 곳에 쌓아 둔 채 바라보지 않았다. 이 드라마는 이런 식으로 '폭력을 허용하는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적 규범'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이 고발을 마주하고 바라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당신이 죽였다’는 제목부터 불편하니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