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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9 (금)

    [경제직필]유럽과 미, 누가 더 문명소멸 걱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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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또 유럽인들의 경악과 분노를 자극했다. 그가 ‘경제적 쇠퇴’는 물론 ‘문명소멸’까지 거론하며 유럽을 비하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진원지는 최근 미국이 공개한 33쪽짜리 국가안보 전략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유럽 경제의 글로벌 국내총생산(GDP) 비중이 1990년 25%에서 현재 14%까지 감소했다며 그 원인을 유럽의 규제 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더욱이 유럽의 시민권 정책이나 개방적 대외정책, 열린 이민정책 등 일련의 유럽적 정책 탓에 ‘문명의 소멸’을 전망할 정도로 쇠약해지고 있다고 보고서는 진단한 것이다.

    그리고 유럽이 규제 정책 등 현재 정책을 고수한다면 20년 안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경제력과 군사력이 위축될 것으로 전망했다. 동맹국에 대한 기본적 예의조차 없다고 유럽 지도자들이 거센 비난을 쏟아낼 만한 독설이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히 평가해보자. 과연 유럽 사회는 정말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나? 그리고 그 이유가 정말 규제나 개방적인 이민정책 탓인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유럽 복지국가에 대한 기대는 잊고 미국 실리콘밸리의 인공지능(AI) 혁신과 지붕 뚫고 올라가는 자본시장을 바라봐야 하나?

    분명 명목 달러 기준으로는 미국의 경제 규모가 올해 전망치 기준으로 30조달러를 초과해 세계 경제의 26%를 넘을 정도로 막강하고 유럽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구매력 환산 기준으로는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유럽 14%와 미국 14.7%로 큰 차이가 없다. 유럽의 비중이 분명 줄어들고는 있지만 미국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말이다. 특별히 이상할 게 없다. 최대 인구 대국 중국과 인도가 각각 19.6%와 8.5%로 경제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기 때문이다. 종종 잊고 있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1800년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인도는 2000년 가깝게 항상 세계 경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었다.

    물론 최근 유럽이 유난히 궁색한 처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유럽연합(EU)은 ‘미국에는 안보를, 러시아에는 에너지를, 그리고 중국에는 무역을’ 의존해왔다. 하지만 이제 트럼프는 안보를 유럽에 떠넘기고 있고 러시아의 에너지 단절을 강요받고 있으며 상호보완적 무역 관계였던 중국과는 경쟁 관계로 전환됐다.

    더욱이 AI 경쟁에서는 미국에 밀리고 녹색 제조에서는 중국의 추월을 허용한 결과, 최근 유럽의 혁신 능력과 경쟁력이 약해진다는 불안감이 유럽 내부의 극우 발흥을 부채질하는 경향마저 있다. 그런 이유로 지난해부터 ‘유럽의 경쟁력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일부 AI 규제와 기후 규제를 늦추려는 움직임이 있다. 물론 유럽은 기존의 기후 대응 기조나 탄소중립 계획 어떤 부분에서도 미국처럼 근본적으로 후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유럽 특유의 규제 탓에 AI나 디지털 경쟁력이 약해진다는 주장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미국 법학자 아누 브래드퍼드가 적절히 반박한 것처럼, EU 회원국 간 규제 차이, 취약한 자본시장, 상대적으로 가혹한 유럽 파산법, 위험 회피적 문화, 외국 인재 유치의 어려움 등 EU에 내재하는 약점들이 미국 대비 유럽 AI 경쟁력을 약화하는 요인이다. 디지털 규제나 AI 규제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유럽이 미국 빅테크를 제대로 규제하지 못한 결과 유럽의 유망한 스타트업의 성장 기회가 번번이 사라졌다는 비판도 있을 정도다.

    또한 프랑스의 생태경제학자 엘리오 로랑도 유럽이 경쟁국들에 뒤처져 있으며 따라잡아야 한다는 반복되는 서사를 비판하면서, 이른바 ‘경쟁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질문했다. 그는 진정한 유럽의 경쟁력은 규제를 풀고 이민자를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보호를 제공하고 자원을 재분배함으로써 전통적인 유럽의 복지를 더욱 튼튼히 하는 데서 온다고 강조했다.

    한편 미국은 AI 거품에 의지한 증권시장 고공행진과 성장률 호조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은 더 극심하게 벌어지고 쇠약한 제조업 기반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거의 전체 동맹국들의 희생을 대가로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는 트럼프 정부가 두 번이나 집권하는 비극을 자초했다.

    심지어 미국 안보 보고서는 “미국을 위협하고 적대 세력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재앙적인 ‘기후변화’ 및 ‘탄소중립’ 이념을 거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전 세계적인 기후재난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쯤 되면 과연 문명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나라는 유럽인가 아니면 미국인가.

    경향신문

    김병권 녹색전환연구소 소장


    김병권 녹색전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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