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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9 (금)

    [일사일언] “선생님, 이렇게 건강을 챙기시면 저희는 뭐 먹고 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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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황석영은 고희(古稀)를 넘겼을 때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살았다. 주변에 문인들이 많았다. 어느 날 황석영은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에 열중했다. 마흔을 갓 넘긴 후배 작가가 대선배를 알아보곤 황급히 뛰어와 재롱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선생님, 이렇게 건강을 챙기시면 저희는 뭐 먹고 삽니까.”

    세월 따라 황석영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지난 2020년 일흔일곱 살에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를 냈다. 한동안 그의 창작 활동이 뜸했다. 이달 초 소설가 성석제의 아들 결혼식에 갔더니 문인들이 황석영의 근황을 들려줬다. “군산에 정착하시더니 그곳의 팽나무를 소재로 소설을 쓰셨대.”

    조선일보

    할매 (창비 제공)


    지난 1993년 대법원은 ‘소설가의 가동 연한은 60세’라고 판결했다. 그 판례는 황석영의 ‘만년(晩年) 활동’ 때문에 곧 뒤집힐 수밖에 없다. 지난주 황석영은 5년 만에 신작 소설 ‘할매’를 냈다. 어느덧 여든두 살. 오른쪽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더 쓰겠다고 밝혔다.

    소설 ‘할매’는 짧은 장편에 속한다. 하지만 젊은 황석영이 쓴 대하소설 ‘장길산’ 못지않게 왕성한 필력이 옹골차다. 군산의 600년 묵은 팽나무를 중심으로 시공을 뛰어넘는 서사가 활달하게 전개된다. 소설의 등장인물 중 ‘몽각’의 떠돌이 인생은 왠지 모르게 작가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생의 황혼에 이른 몽각은 혼잣말을 자주 한다. 자신을 안팎으로 나눠 대화하느라 시간이 예전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자아에 더는 집착하지 않으니 인연의 순환에 눈을 뜬다. 인간과 세계의 경계가 무너진다.

    노벨문학상(1993년) 수상 작가 토니 모리슨은 “여든한 살이 되니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졌다”라면서 신작을 냈다. 건강을 잘 다스린 작가에겐 만년이 탄력 넘치는 도약대가 되나 보다.

    [박해현 ‘한국문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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