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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0 (토)

    [기고]지방자치법 개정, 다른 자치를 상상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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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니투데이

    주민자치법제화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인 황종규 동양대 교수


    2025년 12월 마침내 국회는 지방자치법 제17조(주민의 권리)에 '주민자치회' 조문을 신설하는 개정안을 상임위와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에 부의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시범 사업 이후 13년, 1988년 지방자치법 전부개정 이후 37년 만이다. 자치의 주인은 주민이며 자치권은 주민에게 있다는 명료한 원칙이 입법자에게 수용되기까지, 우리에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간 주민자치회는 제도적 불안정과 시범 사업의 한계 속에서도 전국 1600여 읍·면·동에서 주민 의제 발굴, 주민총회 운영, 주민참여예산, 사회·문화 서비스 생산, 일상의 문제해결을 위한 민관협력, 사회적 우정의 회복 등 '주민에 의한 자치'의 실질적 가능성을 보여줬다. 매년 열리는 전국주민자치박람회는 이 성과가 공유되고 때론 경쟁하기도 하는 거대한 자치 학습장이었다. 선출직과 관료 중심의 자치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주민자치회는 자치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주민의 일상을 바꾸는 제도적 투자임을 증명했다.

    '87 체제'가 국가 중심 민주화에 역사적 성과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대공장, 대규모 조직에 기반한 '큰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중앙집중과 관료주의를 강화했다. 오늘날 조직보다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를 선호하는 흐름은 오히려 얼굴이 보이는 '슬세권'(슬리퍼와 세권의 합성어)의 '작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87 체제 극복의 출발점은 더 큰 성장과 거대 담론이 아니라 읍면동과 마을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주민들의 '작은' 자치 실천일 것이다.

    새 정부가 '주민주권 지방정부 구현'을 자치분권 분야의 핵심 국정 목표로 설정한 것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제대로 짚은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방식이다. 전국 단위의 획일적 제도 설계와 관료적 관리가 아니라 결정권을 주민과 읍면동 단위로 과감히 나눠야 한다. 다양성과 좋은 거버넌스를 핵심 기준으로 삼을 때 비로소 주민자치가 현장에서 작동한다. 정부의 역할은 '계획'과 '사업'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주민의 자치 역량을 키우고 마을공동체, 사회연대경제, 통합 돌봄 등 융합과 확장을 뒷받침하는 공공 투자와 협력의 촉진자여야 한다.

    주민자치회는 단순히 읍·면·동에 또 하나의 주민조직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주민 대표성 확보, 예산과정 참여, 주민조례발안, 읍면동 계획, 읍면동 사무 협의와 위탁 등 주민자치회의 실질적인 권리와 기능 확대에 집중해야 한다. 읍·면·동 운영을 민관협력과 주민 주권 관점에서 혁신하게 될 때 '다른 자치'에 대한 상상이 현실로 된다.

    21세기 복합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주체'와 '힘'을 만들어 가는 우리에게 주민자치는 아직 낯선 도전이다. 행정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읍·면·동과 마을을 관리 단위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주민이 직접 만드는 '일상의 작은 자치'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 지역 혁신의 출발점이다. 지역엔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권리가 필요하다. 130년 전 집강소와 향회조규의 리회·면회에서 시작된 자립적 자치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황종규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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