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상 칼럼니스트·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 |
'만약 우리가 모두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는 자문했다. 그가 말하는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어리석거나 위험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번번이 막아온 트럼프 행정부의 관리들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보도한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가 쓴 최신 취재기록물 '전쟁'이란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책의 68장은 트럼프 1기의 마지막 국방장관 마크 에스퍼가 2020년 트럼프를 어떻게 설득해 그의 고집을 꺾었는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해 여름, 에스퍼와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현역군인 1만명을 워싱턴 DC에 투입하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당시 벌어진 흑인 인권 시위에 대해 트럼프는 에스퍼에게 "그냥 쏴버리면 안 되나?"라고 물었다.
하지만 에스퍼는 정예 군부대를 수도에 배치하는 작업의 어려움을 이유로 이를 반대했다. 함께 있던 밀리 합참의장마저 '불가(不可)'를 밝히자 마침내 트럼프가 소리쳤다. "우리가 약해 보인다고. 당신들은 패배자들이야. 모두 패배자들이라고!"
집권 1기 때 그나마 트럼프를 제어했던 것은 '어른들의 축(axis of adults)'으로 불리는 미 행정부 내 중량급 고위 참모들이었다. 이들은 태평양 건너 한반도의 운명도 여러 번 좌우했다. 일례로 에스퍼 국방장관은 퇴임 후 쓴 회고록 '신성한 맹세(A Sacred Oath)'에서 1기의 트럼프가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명령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고 밝혔다.
2019년에 트럼프가 '주한미군 완전 철수'를 주장하자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두 번째 임기에 하자"고 만류했고, 트럼프는 "그렇지, 두 번째 임기"라며 후퇴했다.
이 외에도 북한 선제타격, 한미합동군사작전 중단 등 트럼프의 충동적인 시도들을 백악관 비서실장, 국방장관, 합참의장, 국무장관 등이 일제히 나서 가로막았던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서류를 트럼프에게서 훔쳐 도망친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장도 이 '어른' 중 한 명이었다.
반면 트럼프 2기에는 '어른들의 축'이 잘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가 외교·안보 라인에 젊은 '충성파'들을 대거 기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트럼프 2기에도 대통령의 독주를 제어·견제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파월을 해고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올해 4월, 하루 전날만 해도 제롬 파월 연준 의장(중앙은행 총재격)을 '실패자'라고 모욕했던 트럼프가 입장을 180도 바꾸자 미 금융시장이 일제히 환호했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금융시장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중시한다는 점을 트럼프에게 설득한 결과였다.
'월가의 황제'라고 불리는 JP모건체이스 회장은 베선트를 가르켜 "그는 어른"이라고 격찬했다.
미국의 집권여당인 공화당도 대통령 견제에 나섰다. 야당인 미 민주당 상원의원을 반역 혐의로 처벌하려는 트럼프와 국방부의 움직임을 최근 미 공화당 상원 군사위원장이 제지한 것이다.
트럼프 1, 2기 정부에서 대통령의 독단을 제어하는 많은 노력들을 보면서 한국의 이재명 정부가 불안해 보이는 건 필자만의 노파심일까.
'직장 내 갑질' 같은 산하기관장과의 낯 뜨거운 공방, 거듭되는 종교단체 해산 위협, 느닷없는 '국뽕' 환단고기 논쟁, 공수표가 되어가는 특별감찰관 임명 문제, 위헌법률로 폭주하는 집권여당 등 해외토픽 같은 비정상적인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대통령의 참모들은 '벙어리'에 가깝다. 이재명 정부에는 진정 '어른'스러운 사람들이 없는 것인가.
[강효상 칼럼니스트·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