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
크리스마스 휴전(Christmas Truce)이라 불리는 사건은 191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벌어졌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어느 전선의 참호에서 독일군 병사들이 노래를 시작한 게 발단이었다. “슈틸레 나흐트, 하일리게 나흐트, 알레스 슈틸, 아인잠 바흐트.” 그런데 그 노래를 듣자 영국군들도 뒤따라 노래하기 시작했다. “사일런트 나이트, 홀리 나이트, 올 이즈 캄, 올 이즈 브라이트.” 노래는 금세 전염되었다. 두 개의 다른 언어로 같은 노래가 전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 노래는 우리도 잘 아는 성탄절 노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다. 오스트리아 사람 프란츠 그루버가 지었으니 영국 입장에서는 적국의 말인 독일어 노래다. 하지만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영국군 누구에게도 적의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두 언어로 불리는 같은 노래는 오히려 고향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했다. 같은 노래를 부르며 모두가 같은 처지가 되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성탄절인데도 집에 가지 못하는 불쌍한 남자들일 뿐이었다. 노래는 제 날개를 펼치고 뚫린 저 하늘로 날아다니며 그들의 군복을 벗겼다. 완전무장 안에 숨기고 있던 인간다움을 드러냈다. 차이를 지우고 같음을 드러내는 것, 음악 특유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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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독일군·영국군은 없었다. 집에 가고 싶은 남자들은 공 하나를 던져놓고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3 대 2로 독일이 이겼다고 하지만, 승패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노래가 총성을, 축구가 전투를 대신했다는 게 중요하다. 세상살이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기준으로 갈라놓지만, 노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잇는다.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 오랜만에 모인 얼굴 중 누군가가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이렇게 부르면 금세 서먹하던 마음이 녹아내릴 것이다. 잊고 살았지만 노래엔 그 마법 같은 힘이 여전하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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