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갈망을 따듯하게 표현한 샤갈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떠오른 그림이 있었다. 마르크 샤갈의 ‘나와 마을’. 소설과 그림 모두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독특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이 가히 독보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가상의 공간을 오로지 분위기로 압도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두 명의 작가. 상실과 갈망의 정서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예술가는 떠올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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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국현에 전시 중인 ‘결혼 꽃다발’
격변기 겪은 대가의 인생 찬가인 듯
러시아의 유대인 차별·가난 속 성장
자신이 세운 미술학교에서 퇴출도
스스로 등진 고향, 예술의 평생 주제
쉽고 아름다운 스타일로 사랑받아
‘결혼 꽃다발’, 197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2021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기증품으로 현재 과천관에서 전시 중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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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모르겠지만, 샤갈이 이런 독특한 그림을 그리게 된 데는 그의 출생과 이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르크 샤갈은 1887년생으로 러시아 제국의 비텝스크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러시아에서 유대인은 정해진 구역 내에서만 거주가 허용되는 이등 시민이었고, 비텝스크는 그런 집단거주지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생선 가게 노동자
아버지는 생선 가게에 고용된 노동자였다. 샤갈은 9남매 중 첫째였는데 어린 시절을 회고한 자서전을 보면 가난하지만 따뜻한 환경이었던 것 같다. 친척과 이웃으로 구성된 공동체 속에서 그는 소심하지만 정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로 성장했다.
유대교 교리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일반 공립학교에 진학할 때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교장을 찾아가 돈을 따로 지불하고 나서야 입학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 옆자리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샤갈은 마법을 접한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그림이라는 것 자체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로 그는 홀린 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가난한 노동자였던 부모는 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이 걱정이었지만 그의 꿈을 묵묵히 지원해주었다. 샤갈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 학교에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물품 배달용 통행 허가증을 어렵게 구해주었다. 유대인이 도시 간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허가증이 필요할 정도로 차별이 심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대도시에서 예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샤갈은 스물세 살에 파리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후원가들의 도움으로 그는 1910년에 파리에 입성했다.
1910년의 파리는 소위 ‘황금시대’를 누리던 예술의 중심지였다. 샤갈은 몽마르트르에 있는 예술가들의 공동작업실에 거주하면서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다. 청어를 사서 첫날은 머리 부분, 둘째 날은 꼬리 부분을 빵조각과 함께 먹고 새벽 두세 시까지 그림을 그리다 잠든 날들이었다.
이 시절, 그리운 고향의 모습이 그림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떠다니는 인물들, 바이올린 연주자, 염소와 닭, 작은 집들이 늘어선 거리는 모두 비텝스크의 풍경과 사람들이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샤갈 예술의 중요한 영감이었다. 그리고 이는 평생에 걸쳐 지속되었는데, 유대교 문화의 중심지였던 비텝스크가 2차대전 중 독일군의 대규모 학살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샤갈의 예술을 추동하는 중요한 정서는 상실과 갈망이었다.
샤갈은 당시 유행하던 입체주의나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완전히 독자적인 스타일을 지켜나갔다. 소박한 소재를 몽환적으로 표현하는 방식, 색채의 절묘한 사용은 당시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따뜻하면서도 왠지 서글픈 분위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서른도 되기 전에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연인과 에펠타워’, 1913. [사진 위키아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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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와 암흑기는 전쟁과 함께 찾아왔다. 1914년, 베를린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성공리에 개최한 샤갈은 전시를 열어둔 채 러시아로 향했다. 고향에 두고 온 연인과 결혼해 파리로 데려올 계획이었다.
1920년대 초 샤갈. ⓒ마크와 이다 샤갈 아카이브 |
그의 연인 벨라는 비텝스크에 보석상을 세 개나 가지고 있는 부잣집 딸이었다. 벨라의 집에서는 가난한 집안 출신 화가인 샤갈이 반가울 리 없었다. 샤갈은 어렵게 허락을 구해 결혼식을 올렸지만 아내를 데리고 파리로 돌아가려던 애초의 계획은 1차 대전의 발발로 무산되었다. 국경이 폐쇄되자 그는 발이 묶였다. 그리고 8년간 러시아에 머물면서 엄청난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절대주의 말레비치에 의해 퇴출
샤갈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시를 열면서 러시아 내에서도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7년, 10월 혁명으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종교와 출신에 대한 차별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자 이전의 신분 질서는 하루아침에 반전되었다. 부자였던 처가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박해를 받았다. 반면 노동자 계급이었던 샤갈은 오히려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그는 국가의 중책을 제안받았지만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 고향 마을에서 교육에 힘쓰기로 결정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
샤갈은 비텝스크의 미술위원으로 임명되어 개혁적인 미술학교를 설립했다. 나이 제한과 등록금이 없는, 모두를 위한 학교였다. 그는 전통적인 예술이나 전위적 예술에 전부 열려 있었고 다양한 스타일의 화가들을 교수로 초빙해 왔다. 그런데 그 중, 말레비치가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라는 미술사조를 창시한 화가이다. 추상미술 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고 극단적인 경향이다. 그는 예술에는 현실 세계를 넘어서는 고결하고 순수한 정신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구체적인 형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색채를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는 검은색의 사각형. 샤갈의 화풍과 이보다 더 다를 수 없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1915. 샤갈과 말레비치는 예술에 대한 견해 차로 큰 갈등을 겪었다. |
말레비치는 모든 면에서 샤갈과는 반대였다. 샤갈은 온화하고 수줍음이 많은, 약간은 유약한 인물이었다. 이론보다는 직관과 감성을 중시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반면 말레비치는 운동 선수 같이 강인한 겉모습에 카리스마가 넘쳤다. 화가보다는 이론가·선동가에 가까웠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학생들을 모아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독특한 인사법을 만들어 구호처럼 외치고 선언문을 만드는 등 거의 정치 집단처럼 움직였다. 말레비치의 그룹은 6개월 만에 학교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뿐 아니라 비텝스크의 공식적인 예술활동, 즉 전차 내부를 장식하거나 배급표를 디자인하는 등의 작업을 독점했다.
드로잉을 가르친 샤갈과는 달리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라는 일종의 신념 체계를 가르치며 젊은 학생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예술가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며 다양한 미술 사조를 공존시키려 했던 샤갈의 교육 방향은 부르주아적 개인주의라고 공격했다. 자신이 세운 학교 안에서 샤갈은 점차 고립되었다.
결국 1년도 지나지 않아 샤갈은 교장 자리와 거주지를 모두 빼앗기는 모욕을 당하며 내쫓기듯 학교와 고향을 떠났다. 학생과 동료 교수들에게 느낀 배신감으로 그는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그런데 인생을 알 수 없으니, 말레비치의 권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득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소련의 공식 예술로 채택되고 추상미술은 핍박을 받았다. 추상의 선두주자인 말레비치는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는 등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3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반면에 고향에서의 굴욕을 계기로 파리로 돌아간 샤갈은 그 이후로 50년을 더 살면서 승승장구했다. 2차대전 중에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해야 했지만 명성은 점점 올라갔다. 전쟁 때문에 7년간 체류한 미국에서도, 여생을 보낸 파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엔 본부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평화의 창’, 1964. 샤갈이 제작한 뉴욕 유엔 본부의 스테인드글라스다. [사진 유엔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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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은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무대디자인과 삽화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1956년에 출간된 구약 성경의 삽화는 찬사를 받았다. 유럽 여러 성당을 비롯해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기도 했다. 1964년에는 프랑스 문화부 장관의 의뢰로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 천장화를 그렸으며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도뇌르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샤갈은 예술가로서 누구보다도 성공한 화가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론과 사조가 연달아 등장하며 미술의 패러다임 자체가 급변하던 시대의 흐름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는 느낌도 있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쉽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는 이념도, 아이디어도 아닌, 오로지 감성과 감각만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마지막 화가였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마을’, 1911. 샤갈의 고향 마을은 평생의 그림 소재였다. [사진 위키아트] |
애초에 그는 타고나기를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가 평생 즐겨 그린 것은 고향 마을의 풍경과 사람들, 성경 이야기, 그리고 꽃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그가 그린 꽃다발 그림이 한 점 소장되어 있다.
과천관에 전시 중인 이 작품은 90세께, 말년의 평온함 속에서 그린 것이다. 왼쪽에는 다정한 연인과 마을, 오른쪽에는 정물이 작게 그려져 있고 중앙에는 붉은 꽃이 한가득 피어 있다. 20세기의 파란만장한 정치적·예술적 격변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노화가는 이 그림에서 인생과 사랑, 예술에 대해 조용히 찬사를 보내는 듯하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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