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 마니아' 김선형 번역가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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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국내 대표 영문학 번역 전문가인 김선형 번역가가 12일 서울 종로구 자택 서재의 서가에서 제인 오스틴 책을 짚고 있다. 그는 결혼 당시 남편과 '책이 방 하나에서 넘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했다며 읽은 책은 정리하고, 아직 읽지 않은 책 위주로 꽂아두는데, 제인 오스틴 책은 여기 그대로 꽂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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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2025년 12월 16일.'
김선형 번역가는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을 새로 옮기며 이 날짜만은 기필코 지켜냈다. 250년 전 바로 이날, 오스틴의 생일에 맞춰 책을 내놓기 위해서였다. "제인 오스틴 마니아라면 이 책을 소장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걸요?" 전 세계적 오스틴 열성팬을 뜻하는 '제이나이트(Janeite)'를 자처하는 김 번역가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메리 셸리, 토니 모리슨, 수전 손택, 실비아 플라스, 마거릿 애트우드, 조앤 디디온 등 수많은 영문학 작품을 30년째 우리말로 옮겨온 그가 이번에 선택한 작가는 제인 오스틴이다. 영문학사 최초의 위대한 여성 작가. 김 번역가는 오스틴이 생전 '한 숙녀(by a lady)'라는 익명으로 세상에 내놓았던 소설 여섯 권을 매년 두 권씩 전부 번역해 선보일 계획이다. 올해 두 권이 먼저 나왔고, 내년 12월 16일에는 '맨스필드 파크'와 '에마'가 나온다. '노생거 애비'와 '설득'은 2027년 12월 16일로 출간일이 이미 확정됐다. "죽기 전에 꼭 제인 오스틴을 번역해보고 싶었다"는 그의 말.
김 번역가에게 연락을 취했던 건 지난 7월이었다. 그에게서 '로밍 발신' 답변이 왔다. 당시 그는 북미제인오스틴학회(JASNA)가 주관하는 12일 여정의 '제인 오스틴 투어'를 위해 영국에 머물던 차였다. 12월로 유예됐던 그와의 만남이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김 번역가의 서재에서 마침내 이뤄졌다.
김선형 번역가가 제인 오스틴이 태어난 지 정확히 250주년이 되는 2025년 12월 16일을 기해 세상에 선보이는 '오만과 편견'을 보이며 웃고 있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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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오스틴 생일날 '새 번역' 출간
인쇄소에서 갓 나온 오스틴의 책 두 권을 앞에 두고 김 번역가는 "내가 읽고 싶은 방식의 판본이 없어서 아예 내가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제인 오스틴의 전작을 번역하고 싶다는 오랜 꿈을 실행에 옮기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더 이상 번역가로 살 수 없겠다고 절망하던 때였다. 2년 전 우연한 자리에서 그는 "번역을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직접 출판사를 차려 펀딩을 해서라도 오스틴 책 한번 내보고 끝내야겠다"고 털어놨다. 마침 그 자리에 허정은 엘리 편집장이 있었다. 바로 다음 날 김 번역가는 "계약서 들고 찾아가겠다"는 허 편집장의 연락을 받았다.
이후 작업은 일사천리. 배수진을 쳤다. 출간일은 처음부터 오스틴의 250주년 생일인 올해 12월 16일로 못 박아둔 터였다.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판본과도 달라야 했다. 제인 오스틴 작품 읽기에 깊이와 재미를 더할 수 있는 오스틴의 모든 것을 담은 뉴스레터 '제인 오스틴의 편지함'을 띄웠다. 올 초부터 매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총 30편 발행한 레터는 1,000여 명이 받아 보면서 입소문을 탔다.
김선형 번역가의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제인 오스틴 관련서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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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번역가에겐 영미권에서 출간된 여러 오스틴 판본과 연구서, 관련서를 두루 섭렵하고, 오랜 '제인 오스틴 덕질'로 축적해온 방대한 정보가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영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 6부작 비디오테이프를 직구해 손수 한글 자막을 달고 소규모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남주인공 다아시 역을 맡은 배우 콜린 퍼스의 국내 온라인 팬클럽을 운영했을 만큼 유명한 오스틴 마니아. "번역 작업과 뉴스레터 발행을 병행했지만, 글을 쓰는 게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문제였죠.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못해도 책 3권 분량은 더 남아 있거든요." 뉴스레터로 발행한 글 역시 개고를 거쳐 '디어 제인 오스틴: 젊은 소설가의 초상'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으로 이번에 함께 펴냈다.
오스틴 처음이라면 '오만과 편견'부터
김 번역가는 전력을 다해 18세기 영국의 오스틴과 21세기 한국 독자를 잇는다. 오스틴에 입문할 땐 '오만과 편견'을 먼저 읽고 그다음 '에마'와 '설득'을 차례로 읽으라고 권한다. 그는 "이 세 작품은 구조적으로 가장 군더더기 없는, 모든 단어와 문장이 적재적소에 놓여 정확히 의도된 기능을 수행하는, 완벽하게 짜여진 소설"이라며 "서사 흡입력이 가장 뛰어나고 심리 묘사도 가장 예리하다"고 했다.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김 번역가는 '오만과 편견'을 3번에 걸쳐 마감했는데 원고를 받아본 편집자가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다른 판본을 찾아 읽었다"는 후문.
제인 오스틴 탄생 250주년을 맞아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된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왼쪽부터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김선형 번역가의 에세이집 '디어 제인 오스틴: 젊은 소설가의 초상',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김 번역가는 오스틴 책은 무조건 예뻐야 했다며 책을 펼쳐도 책등이 꺾이지 않도록 신경 썼고, 표지는 출판사에서 잘 쓰지 않는 수입 고급지로, 글자 색깔도 디자이너가 조색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색이라고 했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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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문장은 거침없이 덜어내는 "문체의 혁신가" 면모 역시 오스틴이 당대 작가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18세기의 숏폼이나 웹소설에 비견될 정도의 '빠른 템포'는 현대 독자들이 꾸준히 오스틴을 찾는 이유 중 하나.
잘생긴 부자 남편 없어도 불행하지 않았을 것
'여성의 권리 옹호'(1792)를 발표했던 사상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와 오스틴의 연결고리에도 주목했다. 오스틴은 1795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김 번역가는 "특히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은 울스턴크래프트에 대한 서사적 화답 같은 작품"이라며 "울스턴크래프트를 의식하지 않고선 그런 글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잘생긴 부자 남자를 만나는 환상을 꿈꾸는 노처녀라는 이미지"에 오스틴을 오래 가뒀던 오만한 편견을 깨부수면서다.
그는 "오스틴 소설의 주인공들은 (남주인공인) 페라스나 다아시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아무도 자살하거나 비참한 불행 속에서 한 번뿐인 자기 삶을 방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적극 항변한다. 이들 여성은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의식의 주체다. 그는 "오스틴과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상적 연관성이 그간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데에는 남성 중심 비평계의 '인지적 편향'이 작용한 탓"이라며 "오스틴을 가정과 연애 서사에 머무는 작가로 축소해 이해하려는 시선 탓에 그의 성취와 문제의식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했다.
김선형 번역가는 대학 4학년 때 '오만과 편견'을 처음 원서로 읽으면서 제인 오스틴과 사랑에 빠졌다며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보내는 장면에서부터는 누워 있다 벌떡 일어나 읽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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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틴 소설의 동시대성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김 번역가는 '오만과 편견'의 유명한 첫 문장("온 세상이 인정하는 진리 하나는 재산이 많은 독신 남자라면 반드시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이에요.")을 이란의 여성 영문학자가 이렇게 패러디한 사례를 언급했다. "자산 규모와 상관없이 무슬림 남자라면 반드시 아홉 살짜리 동정 신부가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라지요."
문학 번역은 고유한 '나'로서만 할 수 있어
김 번역가는 "국내에 오스틴 팬덤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오스틴의 소설이 더 많은 이들에게 도달할 수만 있다면 번역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는 각오다.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어수선한 시대라지만 사람의 머리로 문학을 쓰고 읽고 옮기는 일은 변치 않는 의미가 있다고 그는 믿는다. "지적인 로봇이 과연 문학 번역을 대체할 수 있을까요. 사람도 나 자신이 아니면 이렇게 옮기지 못할 텐데요. 이 작업이 고유한 나로서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AI의 존재는 아무 문제가 아니겠지요." 사람만이 번역이라는 행위를 통해 문학에 대한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믿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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