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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2 (월)

    '글루텐 불내증' 셰프가 빵집을? 고객 향한 온기 담은 바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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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우가 만난 셰프들]
    <21> 부요네뜨 & 오부이용 이성대 셰프

    편집자주

    음식을 만드는 건 결국 사람, 셰프죠. 신문기자 출신이자 식당 '어라우즈'를 운영하는 장준우 셰프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너머에서 묵묵히 요리 철학을 지키고 있는 셰프들을 만납니다. 한국 미식계의 최신 이슈와 셰프들의 특별 레시피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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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대 셰프가 운영하는 서울 성동구 부요네뜨의 바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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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아침은 빵 굽는 냄새로 시작된다. 거리 모퉁이마다 자리 잡은 '불랑제리(Boulangerie)' 앞은 갓 구워낸 바게트를 사 가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빵을 겨드랑이에 끼고 집으로 돌아와 버터를 바르고 커피를 내리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풍경, 그것은 파리라는 도시를 지탱하는 다정한 일상이다.

    서울 옥수동 언덕길, 이 파리의 감성을 그대로 담은 향기를 피워내는 곳이 있다. '부요네뜨(Bouillonette)'가 바로 그곳이다. 문을 열면 서울의 분주함은 잠시 잊히고 구수한 바게트 향이 코끝을 감싼다. 달달한 간식용 빵집이 만들어내는 버터 향과는 확연히 결이 다르다. 부요네뜨에서 매일 아침 바게트를 구워내는 이는 프렌치 비스트로로 동네에서 이미 유명한 '오부이용(Au Bouillon)'의 오너, 이성대(41) 셰프다. 편안한 프랑스 가정식 요리와 함께 오감을 자극하는 따뜻한 바게트를 굽고 있는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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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우가 만난 셰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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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거절을 당한 '프렌치 요리사'


    "사실 저는 글루텐을 잘 소화하지 못하는 '글루텐 불내증'이 있어요. 그런 제가 빵을 만들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죠." 이 셰프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오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바게트를 꺼냈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 불량은 물론 두통까지 찾아온다는 그가 어째서 굳이 빵을 굽는 고행을 자처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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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대 셰프가 매장에서 바게트 반죽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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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셰프의 요리 인생은 열 살 무렵, 맞벌이 부모님을 기다리며 혼자 볶음밥을 해 먹던 부엌에서 시작됐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파를 썰고 밥을 볶으며 그는 자연스레 요리에 마음을 뺏겼다. 횟집에 가서도 '이게 광어인지 우럭인지 알고 먹어야 한다'며 미식의 기본을 강조하던 아버지의 가르침도 한몫했다. 공부보다 요리가 더 좋았던 소년은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본격적인 요리사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가 프렌치 요리사가 된 건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거절을 통해 선택된 결과였다. "원래는 일식을 하고 싶었어요. 칼을 쓰는 섬세함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이 제가 왼손잡이라는 이유로 안 된다고 하셨죠. 지금이야 큰 문제가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왼손잡이가 사시미 칼을 쓰면 결이 반대로 나가서 생선 살을 많이 버리게 된다는 이유로 주방에 들이지 않았어요."

    일식을 포기하고 중식으로 눈을 돌렸지만, 이번엔 '화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벽에 부딪혔다. 보수적인 중식 업계에서 한국인은 호텔급 요리사가 되기 힘들다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양식뿐. 글루텐 불내증 때문에 파스타나 피자가 주식인 이탈리아 요리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타고난 신체적 한계와 외부의 제약, 그 모든 문이 닫힌 뒤에 앞에 놓인 유일한 문이 바로 프랑스 요리였다.

    8년 성취 뒤로하고 결단한 파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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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대 셰프가 갓 구워진 바게트를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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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셰프는 삼청동의 프렌치 요리 터줏대감 '아따블르'에서 8년간 일하며 막내에서 주방 책임자까지 올랐다. 하지만 익숙함은 도리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눈 감고도 요리를 해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는데, 문득 제가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스스로가 프렌치 요리의 껍데기만 흉내 내고 있다는 갈증을 느꼈다. 단순히 레시피를 재현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프랑스인들이 식탁에서 나누는 정서와 문화, 그 음식의 진짜 '본질'을 배우고 싶었다. 안정된 직장과 미래를 뒤로하고 서른 즈음의 그가 맨땅에 헤딩하듯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유였다.

    2014년 파리로 건너간 그는 한국인 입양아 출신의 스타 셰프 피에르 상 보이에(Pierre Sang Boyer)의 레스토랑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6년 반 동안 파리에 머물며 그는 프랑스 요리와 문화를 온몸으로 흡수했다.

    "피에르 상 셰프는 '최고의 한 접시'를 만드는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최고의 경험'을 주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었어요. 불만을 갖고 컴플레인을 걸던 손님도 나갈 때는 웃게 만들거든요. 맛은 기본이고, 결국 중요한 건 손님이 이 공간에서 얼마나 즐거웠느냐는 것이었죠. 저도 제 가게를 열면 손님들에게 그런 즐거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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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요네뜨의 잠봉 프로마쥬 샌드위치. 바게트와 버터, 잠봉, 트러플고다치즈, 에멘탈 치즈가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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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차 자기 공간에 대한 열망을 키우던 그는 팬데믹으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침 옛 스승이 준비하던 공간을 이어받아 2020년 '오부이용'을 열었다. '부이용'은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이 저렴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대중식당을 뜻한다. 이 셰프의 요리는 화려한 기교보다는 투박한 진심에 가깝다. 양파 수프, 에스카르고, 뵈프 부르기뇽 같은 클래식 메뉴들이 주를 이룬다. 유행을 좇아 매번 메뉴를 바꾸기보다, 언제 와도 그 자리에 있는 편안한 맛을 추구한다. 요리사가 즐거운 요리보다 손님이 즐거운 요리를 하겠다는 마음에서다.

    20시간 걸린 바게트, 주말 아침 행복으로


    그가 바게트를 직접 굽기 시작한 것 역시 고객을 향한 마음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아무리 맛있는 요리를 먹어도 곁들이는 빵이 맛없으면 그 식사는 실패한 거예요. 한국에서는 납품받은 빵을 쓰다 보니 성에 차지 않더라고요. 식전 빵을 직접 굽기 시작했는데 손님들이 빵만 따로 팔아달라고 아우성이었죠. 결국 빵을 구울 공간이 더 필요해 '부요네뜨'를 열게 됐습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레스토랑용 식전 빵을 굽는 것과 매일 판매용 빵을 구워내는 제빵의 세계는 차원이 달랐다. 가장 큰 어려움은 기후였다. "프랑스는 여름엔 고온건조하고 겨울엔 저온다습한 편인데 한국은 습도가 정반대예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빵의 퀄리티가 널뛴다는 걸 하면서 알게 됐죠. 온도계와 습도계를 아무리 맞춰도 소용이 없었죠. 벽과 바닥이 머금은 냉기와 습기까지 계산해야 하거든요. 스테이크는 굽다가 좀 더 익히면 되지만 빵은 오븐에서 나오면 되돌릴 수가 없어요. 매일이 변수와의 싸움이죠."

    그는 매일 새벽부터 밀가루와 씨름한다. 1차 반죽을 하고, 본 반죽을 치고, 밤새 저온 숙성을 거쳐 다음 날 아침 구워내기까지 꼬박 20시간이 걸린다. 주말에는 180개, 평일에도 100개가 넘는 바게트를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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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대 셰프가 매장에서 바게트를 들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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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셰프가 추구하는 바게트의 미덕은 '온기'다. 부요네뜨의 바게트는 정해진 시간에만 나온다. 온기가 남은 바게트를 팔되 식으면 팔지 않는다. "아침에 빵집에서 갓 나온 바게트를 사서 안고 오다가 못 참고 끄트머리를 뜯어 먹잖아요. 프랑스에서는 바게트 끄트머리는 사 오는 사람의 몫이라고도 하죠. 그 바삭한 소리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속살, 그리고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 그게 진짜 행복이거든요. 한국에서 파는 바게트는 대부분 식어 있어요.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죠. 저는 손님들이 갓 구운 빵의 행복감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빵이 나오는 오전 10시면 동네 주민들이 부요네뜨 앞에 줄을 선다. 갓 나온 뜨거운 바게트를 받아 든 손님이 가게 문을 나서자마자 참지 못하고 빵 끝을 뜯어 입에 넣는 풍경은 이 셰프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다. "어린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와서 뜨거운 바게트 조각을 호호 불며 먹는 걸 보면 요리사가 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창한 미식은 아닐지 몰라도 제가 만든 바게트를 맛보는 게 누군가의 주말 아침을 채우는 작은 이벤트가 된다는 사실이 저에게 큰 보람이 되죠."

    글루텐 불내증을 앓으면서도 빵을 굽고, 파리의 자유로움을 그리워하면서도 주방을 묵묵히 지키는 그는 바게트를 닮았다. 겉은 단단하고 투박해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촉촉한 이가 아닐까. 차가운 도시의 아침 그가 건네는 바게트 한 조각은 단순한 탄수화물이 아니라 온기이자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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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게트 프렌치 토스트(Pain perdu de la baguette). Pain perdu는 '버려질 뻔한 빵'이라는 뜻의 프랑스 전통 요리로, 하루 이상 지나 딱딱해진 빵을 우유와 달걀에 적셔 다시 구워 먹는 방식에서 시작되었다. 주로 바게트를 사용하며, 소박하지만 깊은 풍미가 특징인 가정식 디저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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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시피] 바게트 프렌치 토스트
    <재료> (※2~3인분) -바게트 200g(하루 이상 지난 것), 달걀 2개, 우유 250g, 무염버터 30g -설탕 30g, 소금 1g, 바닐라빈 1/2개 <만드는 법> 1. 바닐라빈을 길게 갈라 씨를 긁어낸 뒤, 우유에 설탕과 바닐라빈 씨, 소금을 넣어 고루 섞는다. 2. 바게트는 2~3cm 두께로 썰어 준비한 우유 혼합물에 넣고 한 면당 30초 정도 가볍게 적신다. 빵 속까지 완전히 젖기보다는 가장자리가 부드러워질 정도가 적당하다. 3. 달걀은 별도의 볼에 풀어 준비한다. 우유에 불린 바게트를 꺼내 마지막으로 달걀에 가볍게 묻힌다. 4. 팬에 무염버터를 녹이고 중약불에서 바게트를 올려 한 면당 2~3분씩 노릇하게 굽는다. 5. 속까지 고르게 익히기 위해 160℃로 예열한 오븐에서 약 5분간 추가로 익히거나, 팬에 뚜껑을 덮고 약불에서 마무리한다. <조리 팁> 계란을 마지막에 입히면 겉면은 또렷하게 익고 속은 빵의 질감이 살아난다. 우유에 오래 담그면 조직이 무너질 수 있으므로 짧게 불리는 것이 좋다. 시간이 지나 말라버린 바게트를 사용해도 좋다.


    글·사진 장준우 어라우즈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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