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선정한 ‘2025 올해의 책’. 한해 동안 독자들의 책장의 한 켠을 차지한 이 책들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고, 삶을 둘러싼 질문들에 더 깊고 넓은 사유의 답을 제시한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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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한겨레 ‘올해의 책’―국내서 10권
12·3 내란이 발생한 지 1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내란 세력은 청산되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물러났으니 응당 빛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곳곳이 돌아가는 양상을 보면, 아직은 ‘빛의 세상’이 도래하지 않은 듯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과거를 돌아보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점검하며, 미래를 상상하는, 사유의 힘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한해 동안 지면에서 주요하게 다룬 책들 가운데 국내서 10권, 번역서 10권을 골라 ‘한겨레 올해의 책’으로 소개합니다. 사유를 더 깊고 더 넓게 확장하도록 돕는 책,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가차 없이 흔들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며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책들입니다. 기후위기 시대의 파고를 넘어갈 지혜를 담은 책들도 포함됐습니다. 선정된 책들 가운데 단 한권이라도 독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말을 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서점가에서 소설이 특히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넷플릭스보다 더 재밌다’는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가 대표적이지요.'피어라 돼지'와 '죽음 3부작' 등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노래했던 김혜순 시인이 3년 만에 새 시집을 내놓았습니다. 고통마저 “유쾌한 그릇”에 담아 독자에게 건네는 ‘문학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지금, 우리는 이 책들을 ‘사유의 등대’ 삼아 한해를 항해해 왔습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기 위해, 섣부른 낙관에 기대지 않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항해를 시작해야 합니다. 내년에는 이 항해의 길이 조금은 더 밝기를, 또 제대로 된 방향이기를 바랍니다.
한겨레 텍스트팀
김건희는 보았을까, 성해나의 ‘혼모노’
혼모노 l 성해나 지음, 창비 |
서울예대 재학 중인 2019년 신춘문예(중편) 등단한 작가 성해나(31)의 두번째 소설집이다. 지난해 말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과 함께 휩쓸린 문학 출판 시장에서 드물게 우뚝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소란함과 소적함 사이 완급으로 리듬 타는 문장력 덕분일까. 풍자적 세태, 역사, 세대 갈등, 청춘, 욕망까지 실로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아우른 덕분일까. 표제작 ‘혼모노’로 가짜가 가짜와 합세하여 진짜(ほんもの, 혼모노)를 농락하던 정치판이 웃프게 은유되는 덕분일까. 적어도 추천사 덕은 소소하다는 것.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등 7편 수록작을 놓고 ‘베스트 논쟁’을 벌이는 독자들 앞에서 말이다. 엠제트 세대 문학의 영역으로 성해나가 끌어온 무당 무속의 세태가 이후 여러 작가의 여러 작품에서 다채롭게 형상화하고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인공지능의 ‘매’ 먼저 맞은 바둑계
먼저 온 미래 l 장강명 지음, 동아시아 |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와 프로기사 이세돌 9단의 대국은 바둑이라는 세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4승 1패 알파고의 압승이라는 결과도 결과지만, 알파고의 수는 인간계 최강 바둑기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인공지능과의 대국에서 인간이 이기는 일은 이 9단의 1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소설가 장강명은 프로 바둑기사들과 전문가들 인터뷰를 통해 바둑계를 강타한 ‘알파고 쇼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알파고가 가한 충격은 바둑계만의 일도 아니어서, 앞으로 문학을 비롯한 다른 분야들 역시 그에 못지않은 충격과 혼란에 빠질 것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대비가 시급하다고 장강명은 강조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김규식의 생애로 보는 근대와 독립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l 정병준 지음, 돌베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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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부부 밑에서 자란 병약한 고아 소년은 훗날 한국의 근대성을 상징하는 학자 겸 정치인이 되었다. 목사와 언더우드의 비서로서 보장된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신산하게 세계를 돌며 독립운동의 가시밭길에 생애를 던진 우사 김규식의 평전. 정직하고 이성적인 현실주의자로서 그는 미-소 협력, 남북 연합, 좌우 합작이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노선이라 판단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권력 의지와 내부투쟁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1881년 출생부터 1945년 해방 후 64살까지 김규식의 삶과 시대를 1872쪽 전 3권에 묶었다. 한국전쟁기 납북돼 1950년 사망할 때까지 시기는 미출간된 4권에 다룰 예정이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뼛속까지 갑족’이었던 실학자 홍대용
홍대용 평전 l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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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담헌 홍대용(1731~1783)의 본모습을 찾아냈다. 담헌은 북경에 다녀와 연행록을 남겼고 국문학, 한문학, 사상사, 경학, 과학사, 수학사 등 다양한 저술을 남긴 실학자로 유명하다. 지구 자전설을 주장한 ‘조선의 코페르니쿠스’이자 중국 중심의 화이론을 부정한 자주적 철학자였고, 신분 차별 타파를 주장하며 조선 사상의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저자는 담헌이 쓴 거의 모든 텍스트를 샅샅이 검토하며 정통 노론 집안에 ‘뼛속까지 갑족’이었던 실제 담헌의 삶을 통해 ‘홍대용 신화’를 타파한다. 담헌의 사상과 주장을 한반도의 근대화와 관련된 ‘내재적 발전’과 관련해 보는 시각에 도전하며 그가 ‘실천적 정주학자’였다고 재의미화한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명예교수의 역작. 200자 원고지 5500장이 두 권의 책으로 묶였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12·3 내란 극복한 집단지성의 힘
계엄, 내란 그리고 민주주의 l 강성현·노영기 외 10인 지음, 역사비평사 |
지난해 윤석열의 12·3 친위 쿠데타 시도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과제를 남겼다. 그날 밤의 재구성부터 이후 1년의 전개 과정까지 관련 기록들의 출간이 올해 내내 이어졌다. ‘계엄, 내란 그리고 민주주의’는 사회학자, 헌법학자, 법철학자, 문인, 역사 교사, 기자, 페미니즘 활동가 등 다양한 직업군의 시민 12명이 지식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펴낸 책이다. 각기 다른 시점에 여러 주제로 쓴 글들을 짜임새 있게 엮어 계엄의 본질과 시민사회의 구실을 한눈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을 ‘구조화한 폭력의 역사’로 분석했다. 법의 예외상태의 실태와 의미, 알고리즘과 극우의 준동, 시민사회의 집단지성을 통한 대응과 새로운 사회의 전망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사람 냄새 나는 토양학 교과서
흙의 숨 l 유경수 지음, 김영사 |
미국 미네소타대학 토양학 교수가 한국어로 쓴 첫 책이다. ‘세계 문화 속의 땅과 사람’이라는 학부생 대상 강의가 책의 토대를 이루었다. 자연과학자가 쓴 책이지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인문 에세이의 느낌을 준다. 흙이 무엇보다 농업과 식량 생산의 터전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만큼, 농토를 비옥하게 만드는 똥 이야기로부터 책을 시작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똥의 질소를 대체할 화학비료가 나오면서 농업 생산량이 급증하는 녹색혁명이 이루어졌지만, 반대급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지구의 건강과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변화 앞에서 ‘오래된 답’ 똥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이 파격적이다. 유기농의 상징과도 같은 지렁이의 뜻밖의 해악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그득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서양 형이상학 뿌리를 파고든 집념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 1, 2 l 김상봉 지음,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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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자 김상봉 전남대 명예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전 14권) 중 제12권 ‘신학’을 주해한 학술 연구서의 전범. 1, 2권 합쳐 1900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원문(제1~10장)과 나란히 대조한 우리말 번역은 28쪽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문장마다 중세 아랍과 라틴 신학을 거쳐 19세기 이후 고전문헌학자들과 현대까지 주석가들의 설명을 꼼꼼히 살피고 비판하며, 저자 자신의 주석을 달고 견해를 밝혔다. 모든 사물의 운동은 그것을 움직이는 외부 근거(원인)가 있다. 그 근거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인과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는 궁극의 원인이 있어야 한다. 그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子)’가 신이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죽음 지나 비쳐오는 생명성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l 김혜순 지음, 난다 |
1979년 시로 등단한 시인 김혜순(70)이 3년 만에 내놓은 자신의 15번째 시집. 시집 ‘피어라 돼지’(2016)에 이어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로 엮이는 ‘죽음 3부작’에서 시현되듯, 죽음을 살아 낸 10년을 지나 우련한 환생의 알림 같다. 후기에 시인은 “고통도 슬픔도 비극도 유쾌한 그릇에 담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이 시집의 내막을 소개한다. 유쾌함이야말로 고통의 심해 속 고독한 소요 상태가 아닐까. 가령 이런 시구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인류애 알알이 담긴 도시 관찰기
이다의 도시관찰일기 l 이다 지음, 반비 |
술술 읽히지만 남는 게 있는 독서를 얼마나 바랐던가.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이다가 핸드폰 대신 관찰 일기장과 펜을 들고 도시 구석구석을 관찰한 결과를 기발한 일러스트와, 통찰력 있는 글로 담아냈다. 허블망원경으로 들여다봐도, 공동체에 대한 애정 없이는 찾을 수 없는 풍경들이 이 책에 알알이 녹아 있다. 만개한 꽃을 이웃과 함께 보고 싶다며 공동 현관 앞에 잠시 내놓은 화분, 메타세쿼이아 나뭇가지에 걸린 열쇠(주인을 찾아 주기 위해 눈에 띄는 곳에 걸어놓은 것이다) 같은 인류애의 작은 증거들을 접하다 보면, 어느새 작가처럼 가장 편한 신발을 신고 현금 3천원을 챙겨 길을 나서고 싶어진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엄마는 왜 고장난 시계가 됐을까
시계탕 l 권정민 글·그림, 웅진주니어 |
365일 24시간 “빨리해!”를 달고 사는 엄마. 그런 엄마에게 슬슬 부아가 치밀 때쯤 엄마가 퍼져버린다. 멈춘 시계가 되어. 처음엔 엄마의 채근 없는 아침을 만끽하던 아이. 엄마가 작동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이는 초조해진다. 킥보드에 고장 난 시계가 된 엄마를 칭칭 동여매고 아이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시계탕’에 가면 엄마를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으스스한 동굴도, 불안불안한 흔들다리도 홀로 건넌다. 그렇게 당도한 시계탕. 그곳에선 멈춰버린 엄마들이 매일 시간에 쫓기느라 한없이 쪼그라든 마음을 서서히 풀어내고 있는데….
엄마에게는 위로를, 아이에게는 각성(?)의 기회를 주는 책이다. 이 땅의 엄마들을 사정없이 조이는 게 과연 아이의 천진한 태만뿐일지 잠시 멈춰 생각해 보게 만든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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