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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0 (토)

    16세 소녀배우에 약물 준 최악 어른들…‘오즈의 마법사’만큼 비현실적이었던 주디의 비극[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주디 갈란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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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 사진전]

    189. 주디 갈란드

    어른들의 탐욕 틈에서

    끝끝내 희망 노래하다

    “풍성하고 관대했던 스타”

    헤럴드경제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 역으로 출연한 당시 주디 갈란드 [CBS Television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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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기사 가장 아래 <후암동 미술관>의 ★특별한 뒷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녀, 도로시
    그리고 소녀, 갈란드
    헤럴드경제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 스틸컷 [감독 빅터 플레밍, MGM, 마운틴픽쳐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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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사랑스러운 양 갈래 머리, 크고 동그란 눈과 카랑카랑한 목소리.

    미국 캔자스의 소녀 도로시가 회오리에 휩쓸린다. 눈을 뜨니 온통 낯선 세상이다. 그곳은 처음 보는 환상의 세계, 오즈의 나라였다. ‘똑’ 떨어진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하나였다. 에메랄드 시티라는 곳에 있는 위대한 자,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 부탁에 나서는 일이었다. 도로시는 곧장 모험길에 오른다. 뇌가 없는 게 아쉬운 허수아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양철 나무꾼, 맹수답지 않게 겁 많은 사자. 이렇게 함께 갈 친구도 사귄다. 소녀가 빌 소원이 귀환이라면, 셋이 바라는 건 각각 두뇌, 심장, 용기였다. 모두의 발걸음은 경쾌하지만, 길목 곳곳에는 뜻밖 함정이 도사린다. 가장 위협적인 악당은 ‘서쪽 마녀’. 다행히 그녀 또한 우여곡절 끝에 물리친다. 그 사이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도와주고, 믿어준다. 결과는 다행히 여정 완수였다. “집만 한 곳은 없다(There is no place like home)!” 도로시는 주문과 함께 드디어 고향으로….

    억지로 부풀려보는 머리, 졸음 가득한 눈과 빨갛게 부어오르는 뺨.

    미국 미네소타 출신 열여섯 살 소녀 주디 갈란드도 회오리에 휩쓸렸다. 겨우 정신 차려보니 또 그 현장이었다. 그곳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장소, 환상으로 ‘꾸며진’ 당시 할리우드의 세트장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도로시 역을 맡은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 속 세상보다도 더더욱 비현실적이고… 잔혹하기까지 한 세계였다.

    각성제와 수면제
    소녀가 마주해야 했던 고통
    헤럴드경제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 스틸컷 [감독 빅터 플레밍, MGM, 마운틴픽쳐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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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시로 분장하기 전 갈란드에게 주어지는 건 각성제였다.

    다시 갈란드로 돌아온 직후 권해지는 건 수면제였다. 약에 취한 채 많게는 수십 시간의 각성. 또, 약에 찌든 채 적게는 한 줌가량의 수면. 그녀는 많은 순간 ‘잠들지도, 깨어있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뿐인가. 촬영 중 갈란드에게 허락된 건 닭고기 수프 한 그릇과 블랙커피였다고 한다. 누군가는 종종 담배를 건넸다고 한다. 다만 다른 음식을 아예 못 먹지는 않았으며, 담배 또한 실제로 피우지는 않았다는 말도 있다. 또, 이토록 악랄한 식단은 영화사의 ‘공식 처방’ 아닌 주변인의 권유였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소녀의 수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감독은 그녀에게 “장난스럽게 연기하지 말라”며 뺨을 친 적이 있었다. 겁쟁이 사자 등 극 중 그녀의 동료들은 현실에선 “풋내기 여자가 주연을 꿰찼다”며 대놓고 떨떠름해했다. 영화 속 무서운 악당, ‘서쪽 마녀’. 스크린 밖에선 외려 그 역할을 맡은 배우(마거릿 해밀턴)가 그녀를 안쓰럽게 봐 챙겨줄 정도였다.

    ‘보석함’이었던 아이
    춤·노래·연기력 다 갖추다
    헤럴드경제

    두 살의 주디 갈란드, 1924, 작가 미상 [The Judy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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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갈란드는 보석함이었다. 거기에는 춤, 노래, 연기 등 빛나는 재능이 가득 들어 있었다.

    1922년생의 갈란드는 세 살쯤부터 두 언니와 함께 공연을 했다. 갈란드의 본명은 프랜시스 검(Frances Gumm). 그렇기에 언니들과의 그룹명도 ‘검 시스터스’였다. 언젠가 무대 진행자가 이들을 “화환보다 아름다운(prettier than a garland of flowers) 소녀들”이라 말했는데, ‘주디 갈란드’란 예명은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다른 설도 있긴 하다).

    갈란드는 언니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가장 많았다.

    해맑은 미소, 타고난 가창력 덕분이었다. 그녀는 1929년부터 단편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35년, 갈란드는 영화사 메트로-골드윈-메이어(MGM)와 계약도 맺었다. 겨우 열세 살일 때였다.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때 MGM은 미국 내 가장 영향력 큰 스튜디오 중 한 곳이었다. 그 시절 할리우드는 배우가 영화사에 몸담고 활동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영재 중 영재’가 일찌감치 초대형 소속사에 들어간 셈이었다.

    환한 웃음뒤 눈물
    어른들의 참혹한 광기
    헤럴드경제

    미키 루니와 주디 갈란드, 1938 [MGM, Clarence Bull, e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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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란드는 영화사 오디션 합격 통보를 받은 그날에도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미소 뒤에는 그만큼의, 어쩌면 그 이상의 눈물이 있었다.

    갈란드는 어쩌다 때가 맞아 ‘캐스팅’된 아이라곤 할 수 없었다.

    한참 어릴 적부터 무대에 오른 데서 알 수 있듯, 어떤 면에선 철저하게 만들어진 소녀였다. 갈란드는 엄하게 자랐다. 특히나 어머니의 집착이 심했다. 그녀는 연예계 종사자였다. 그녀는 일하는 내내 여러 ‘스타’를 봤다. 말 많고 탈도 많지만, 어쨌건 이들이 천문학적 돈을 끌어모으는 일 또한 목격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 또한 그런 스타로 만들고자 했다. 이 바람은 많은 순간 광기에 물들었다. …무조건 예쁘고, 잘 웃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누구 앞이든, 언제 어떤 상황이든. 어머니가 결론 내린 그곳의 생리는 이것이었다. 이 믿음대로 딸을 가르치고, 다그치고, 몰아쳤다. 효과만 있다면 약과 접대 등 뒤틀린 수도 마다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갈란드는 원래 여렸다. 정이 많고, 웃음만큼 울음도 많은 소녀였다. 그저 사랑과 지지, 부드러움만 보여도 정말 쉽게 대할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갈란드는 영화사에 온 후 조연과 단역으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다 <러브 파인즈 앤디 하디(1938)> 등에서 인지도를 올리고, 그다음 해에 대작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 스타 반열에 오른 것이었다.

    헤럴드경제

    ‘썸머 스톡’ 촬영장에서 꽃다발을 든 주디 갈란드, 1949 [MGM 소속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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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 너머 어딘가 아주 높이
    자장가에서 들은 적이 있는 그런 나라가 있어요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극 중 갈란드는 말괄량이 도로시가 돼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를 부른다.

    현실에선 각성제와 수면제를 연달아 복용했다지만, 카메라만 돌면 그토록 청아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갈란드의 자존감은 진작부터 으스러져 있었을 것이다. 이 또한 어머니와 영화사 관계자 등 어른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인정받고 싶었다. 그녀의 키는 151㎝였다. 당시 기준으로는 그렇게 작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종종 “못생긴 오리”라고 불렸다. 그런가 하면 ‘뼈가 보일 만큼’ 마르지 않았다며 “통통(뚱뚱)한 아기 돼지”라 불리기도 했다. 당대 미녀 배우로 꼽힌 라나 터너 등과 외모 비교를 당하는 일 또한 일상 다반사였다.

    그녀는 또래 아이가 그렇듯, 가능한 많은 이의 사랑과 칭찬을 받고픈 마음이었으리라. 나쁜 어른들은 소녀의 그 바람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뿐이었다. 도로시에게는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집만 한 곳’이 있었지만, 갈란드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집만 한 곳’이 없었다.

    분명 사랑 받았지만
    ‘생 마감’을 시도하다
    헤럴드경제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 역으로 출연한 당시 주디 갈란드 [CBS Television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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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가운데, 이제 영화사가 갈란드를 밀어줬다. 영화사는 <오즈의 마법사> 이후 만든 뮤지컬 영화 상당수의 주인공을 갈란드로 했다.

    갈란드는 사랑스러운 ‘이웃집 소녀’(girl-next-door)의 인상을 얻었다. ‘리틀 미스 쇼비즈니스’(Little Miss Showbusiness)라는 별명, 요즘으로 치면 국민 여동생 격인 ‘미국이 가장 좋아하는 동생’이라는 칭호도 따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갈란드는, 갑자기 잊었던 약속이라도 떠오른 듯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를 시도했다. 이 때문에 정신병원에서 2주간 치료도 받아야 했다. 1947년, 아직도 스물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대체 왜?

    이어지는 사랑 실패,
    종종 ‘폭발하듯’ 위태로워지다
    헤럴드경제

    ‘프리젠팅 릴리 마스’ 홍보에 쓰인 주디 갈란드의 사진, 1943 [MGM, Clarence Sinclair Bull, Dr. Mac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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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한 건, 후속작의 흥행 실패 때문은 아니었다. 갈란드의 관객몰이 성적표는 <오즈의 마법사> 이후에도 나쁘지 않았다.

    갈란드는 영화 <리틀 넬리 켈리(1940)>에서 성인 역할을 했다. 사실상 첫 도전이었다. 이는 연기력과 스타성을 재차 확인하기 위한 시험대이기도 했다. 결과는 무난히 통과였다. 이어 그녀는 <프리젠팅 릴리 마스(1943)>에서 다소 ‘글래머러스’한 복장을 하고 등장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1944)>에서 또한 화장과 의상에 힘을 준 모습을 보였다. 작품도, 연기도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그녀가 현대 뮤지컬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도 따라붙었다.

    하지만, 흥행과 이미지 변신은 별개였다. 갈란드를 에워싼 이웃집 소녀 내지 국민 여동생의 틀은 생각보다 더 단단했다. 그녀는 외모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놀림과 비교의 기억이 이를 부추겼다. 언젠가부터는 주변인들이 수시로 격려해야 다음 일정에 나설 수 있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헤럴드경제

    주디 갈란드, 1938 [Heritage Au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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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허함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중 하나는 사랑일 것이다.

    갈란드는 밴드 리더 아티 쇼와 첫 성인 연애를 했다. 끝은 좋지 않았다. 아니, 최악이었다. 쇼는 다른 여배우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상대는 하필 갈란드의 외모 비교 대상, 터너였다. 갈란드는 이후 12살 연상의 음악가 데이비드 로즈와 사귀었다. 둘은 1941년에 결혼했다. 그녀는 그와 교제하는 중 최소 한 번 이상의 몸과 마음 모두 힘든 수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또한 어머니와 영화사 관계자의 강요로 인해. 갈란드는 평생 죄의식을 떨치지 못했다고 한다. 로즈와의 관계도 미완으로 끝맺었다. 1944년, 둘은 이혼했다. 당시 그녀 나이는 스물둘이었다.

    갈란드는 사랑을 쉬지 않았다. 1945년에는 영화감독 빈센트 미넬리와 결혼식을 올렸다. 1년 후에는 딸 라이자도 낳았다. 하지만 그동안… 갈란드는 혹사, 아울러 뿌리 깊이 박히고 만 불안증으로 인해 종종 ‘폭발하듯’ 위태로운 면을 보였다. 그녀는 때로 어디에 홀린 듯 술을 마셨다. 그간 강요받았던 약물을 스스로 찾을 때가 잦아졌다. 일정을 펑크 내는가 하면, 개인 소지품도 줄줄 흘리고 다녔다. 그녀의 상처는 조마조마했다. 1947년의 스스로 생을 끊고자 한 시도는, 이런 가운데 터진 일이었다.

    중독과 입원의 굴레,
    점차 혼미해지고 있던 삶
    헤럴드경제

    ‘썸머 스톡’ 촬영장에서 주디 갈란드와 그의 딸, 1950년경 [작자 미상, e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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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온 후에도 갈란드는 중독과 입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내 앞에 보이는 건 혼란뿐이었어요.
    과거와 함께, 미래까지도 다 지워버리고 싶었지요.
    나를 해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모두를 아프게 하고 싶었어요.
    갈란드는 1950년, 두 번째로 그런 시도한 데 대해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그해 9월, MGM 영화사와 결별했다. 15년 만이었다. 다음 해에는 미넬리와도 이혼했다.

    스타, 블로젯
    그리고 스타, 갈란드
    헤럴드경제

    영화 ‘하비 걸스’ 홍보에 쓰인 주디 갈란드, 1945 [MGM, 에릭 카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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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인 가수 에스터 블로젯.

    블로젯은 우연히 한 사내를 망신 위기에서 구해준다. 남자의 이름은 노먼 메인. 한때는 인기가 상당했지만, 어느덧 한물간 가수가 되고 있는 자였다. 메인은 블로젯에게 저녁 식사로 사례한다. 이후 야간 클럽에서 블로젯의 노래를 들어보는데… 그녀는 분명 보석함이었다. 빛을 보는 순간,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낼 수 있는 존재였다. 블로젯은 그녀를 알아본 메인의 도움으로 뮤지컬 영화에 출연한다. 때에 맞춰 타고난 음색을 보인다. 세상은 그런 그녀에게 찬사로 보답한다. 새로운 디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블로젯과 메인의 관계도 깊어진다. 둘은 결혼한다. 블로젯의 일거리는 나날이 많아진다. 반면, 그러는 사이 메인을 찾는 이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뜨는 별과 지는 별의 이야기. 영화 <스타 탄생(1954)>이었다.

    베테랑 배우 갈란드.

    블로젯의 앞날은 밝았지만, 그런 그녀를 연기했던 갈란드의 앞날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갈란드는 <스타 탄생>으로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나이는 서른둘. MGM에서 나온 후 4년 만이었다. 영화는 분명 성공적이었다. 기대만큼 수익은 내지 못했지만, 이는 500만 달러에 이르는 제작비 등 외부 요인 탓이 컸다. 갈란드는 제27회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후보로 올랐다. 결국 상은 받지 못했지만, 그 자체가 논란이 될 만큼 여전한 연기력과 가창력을 인정받았다.

    5년 이상 살지 못할 수도?
    “평생 처음 압박감이 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갈란드의 삶은 이제 보석함 블로젯보다는 지는 별 메인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갈란드는 <스타 탄생> 촬영을 전후로 또다시 불안증을 호소했다. 공연, 라디오, TV 스페셜…. 갈란드의 일정은 재차 빽빽해졌지만, 그녀의 마음은 공허와 결핍으로 허할 때가 많았다. 1959년, 11월. 갈란드가 급성 간염 진단을 받고 입원을 한 시기. 갈란드는 오죽하면 “아마 5년 이상은 살지 못할 테고, 설령 더 오래 산다고 해도 반신불수가 될 것”이라는 의사 말에 “큰 안도감을 느끼고”, “평생 처음으로 압박감이 풀렸다”고 생각했다(다행히 건강은 되찾았다). 이때 그녀는 그래봤자 서른일곱 살이었다.

    치료와 회복 정말 애썼지만
    보석함의 녹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헤럴드경제

    프랭크 시나트라와 주디 갈란드, 1946 [CBS radio, e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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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평소에는 아무리 정신을 놓고 다녔다고 한들,
    무대에만 오르면 아예 다른 사람이 되곤 했다.라이자 미넬리(주디 갈란드의 딸)
    갈란드는 1961년 카네기홀에서 펼친 공연 실황을 녹음한 앨범으로 제4회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다.

    본인 이름을 내건 ‘더 주디 갈란드 쇼’ 또한 비평가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무대 밑 갈란드는 눈에 띄게 초췌해지고 있었다. 이 또한 불안증과 약물 의존증, 아울러 연속되는 불행한 개인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갈란드에게는 매번 사랑이 쉽지 않았다. 세 번째 남편, 프로듀서 겸 사업가인 시드니 루프트와는 1965년에 갈라섰다. 결혼 기간은 13년이었다. 네 번째 남편은 배우 마크 헤론이었다. 하지만, 이들 또한 다섯 달 만에 별거할 만큼 관계가 다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1969년에 또 찢어졌다. 결혼 생활은 4년. 그녀 입장에선 어느덧 네 번째 이혼이었다. 갈란드에게는 세금 부채 등 빚도 상당량 쌓여 있었다. 그녀는 돈 관리에 밝지 않았다. 애초 아쉬운 조건으로 맺은 계약이 상당수 있었으며, 관계자의 횡령 등 이슈도 있었을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갈란드는 호주 멜버른에서 잡힌 공연에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등장했다.

    그녀를 기다리던 관중은 7000여명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그녀가 또 술 또는 약물에 취해 늦었다고 봐 야유를 퍼부었다. 갈란드는 45분 만에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갈란드는 이에 “잔혹했다”고 회상했다). 말년의 갈란드는 이런 식이었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치료와 회복에 정말 애썼지만, 보석함에 박힌 녹은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꿈을,
    희망을 노래했다
    헤럴드경제

    주디 갈란드와 그녀의 세 자녀, 콘서트 공연 전 무대 뒤 풍경, 1957년경 [존 브라이슨, Heritage Au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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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6월22일.

    갈란드는 영국 런던 내 본인의 임대주택 욕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마흔일곱 살이었다. 검시관은 사인을 놓고 특정 약물에 대한 ‘부주의한 과다 복용’을 언급했다. 이번 일은 이에 따라 사고사로 쓰였다. 유족은 그녀의 다섯 번째 남편이자 음악가 겸 사업가 미키 딘스였다. 그리고 장녀 미넬리, 차녀 로너와 장남 조이였다. 그녀에게 남은 돈은 4만 달러였다. 쌓아올린 이름값치고는 굉장히 소소한 금액이었다.

    갈란드는….
    그저 다 닳아버렸습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허수아비 역을 맡은, 갈란드와 나중에라도 관계를 개선했던 배우 레이 볼저는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뉴욕 맨해튼에서 이뤄진 조문 행렬에는 2만여명이 줄을 섰다. “그녀는 너무도 풍성하고 관대하게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스타 탄생>의 동료 배우 제임스 메이슨이 한 추도 연설의 일부였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 사자 등 친근한 동료와 모험을 함께 했다. <스타 탄생>의 에스터 블로젯은 그녀를 응원하는 동반자 노먼 메인이 있어 도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분장에서 벗어난 현실의 갈란드는 어땠는가. 외려 그 ‘서쪽 마녀’가 안쓰럽게 볼 정도가 아니었는지. “무지개 너머 어딘가엔 파랑새가 날아요. 새들도 날아오르는데 왜 나는… 왜 나는 안 될까요(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 oh, why can‘t I)?” 갈란드는 그럼에도 꿋꿋했다. 삶을 정열과 환희로 채우고자 힘껏 노력했다. 다만 갈란드의 삶을 짚고 ‘오버 더 레인보우’ 말미의 가사를 곱씹으면, 희망의 노래가 약간은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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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 스틸컷 [감독 빅터 플레밍, MGM, 마운틴픽쳐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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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Clarke, G., Get happy: The life of Judy Garland., Random House

    Luft, S., Judy & I: My life with Judy Garland, Omnibus Press

    Petersen, A. H., Judy Garland: Ugly duckling. In Scandals of classic Hollywood, Pl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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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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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헤럴드경제 이원율 기자입니다.

    올해 <후암동 미술관>에서 글을 1년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쓸 수 있었던 건
    평범한 일상이 기적처럼 이어질 수 있어서였습니다.

    이 일상을 가능하게 이끌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헤럴드경제 <후암동 미술관>은
    국가보훈부 ‘모두의 보훈 드림’을 통해 152만원을 기부하였습니다.
    100만원, 여기에 1년 52주의 의미를 기념해 52만원을 더했습니다.

    예술은 미래를 말하는 동시에,
    과거 또한 부단히 다시 바라보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독자님들.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변함없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이원율 기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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