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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2 (월)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박애주의자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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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두 시간째 이어지는 염불 소리가 밴쿠버 퉁린곡위엔(Tung Lin Kok Yuen) 법당을 채우고 있었다. 10여 명의 스님이 합송하는 만다린의 선율이 겹쳐졌다. 토론토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도착한 나는 비몽사몽, 옆자리의 낯선 얼굴들과 함께 미숙한 발음으로, 영문으로 표기된 염불문을 더듬으며 따라 읊조렸다. 최근에 타계한 로버트 H N 호(사진)를 기리는 자리였다. 그가 10년 전에 세운 불교학 연구소(Ho Centre for Buddhist Studies)의 현직 소장 자격으로 참가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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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의 박애주의는 여러 세대에 걸친 가문의 전통 위에 놓여 있다. 그의 할아버지인 호퉁 경(Sir Robert Ho Tung)은 근세 홍콩을 대표하는 거부이자 자선가로, 교육·의료·구호 사업에 광범위하게 관여했다.

    호는 홍콩에서 신문 편집과 언론 단체 활동을 이끌었고, 이후 불교와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한 장기적 후원에 집중했다. 그가 설립한 로버트 H N 호 패밀리 파운데이션은 불교학 연구와 교육, 문화 교류를 핵심 축으로 삼아 북미와 아시아 여러 대학과 기관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왔다. 단발성 기부나 이미지 관리 차원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제도 기반을 마련하는 방식의 후원이었다. 한국 기업과 재단들이 미국 명문대에 한국학 석좌직을 세우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장기 기부가 한국 대학 안에서 뿌리내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날 저녁 리셉션에서 만난 가족들은 소탈했고, 권위의식이 없었다. 찾아온 이들과 차례로 악수와 이야기를 나눴고, 회고 시간에 고인을 둘러싼 기억들이 이어졌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국의 기부금 문화는 큰 규모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홍콩의 쇼브라더스 영화사 주인인 소일부는 중국의 교육과 수학·의학·천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는데, 그가 지은 도서관 등 건물만 6013동에 이른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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