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반 서울 양평동 ㅅ섬유회사 경비실에서 일하던 아버지 모습.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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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생 아버지의 입사 자격은 ‘경상도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60년대 후반 서울 양평동의 ㅅ섬유공장 경비원으로 취업했다. 저곡가정책으로 먹고살기 어려워진 농촌 청년들이 대거 도시로 유입되던 초기였다.
명절에 양복 입고 내려오는 아버지를 보며 공장 경비가 제법 벼슬인 줄 알았다. 그 공장 사장이 먼 친척뻘이라고 들었던 터이기에 아버지를 영입이라도 한 것처럼이나 여긴 것이다.
아버지뿐 아니라 삼촌과 동네 오촌 아재들도 줄줄이 서울의 공장으로 갔다. 피혁 공장이나 제과 공장 같은 곳에서 일한다고 들었다. 하나둘씩 모여들다 보니 동향인이나 사촌 육촌끼리 사글셋방을 얻어 같이 생활했다.
아버지가 일한 섬유공장은 주로 경상도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술을 한 잔 걸친 아버지가 콧구멍만 한 셋방에서 담배를 태우며 사장이 전라도 사람은 뽑지 않는다고 말할 때면 은근한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진골 성골 골품이라도 되는 양 뽑혀간 아버지는, 공장 정문 입구 두어 평 칸에 앉아 들고나는 차와 사람을 관리하는 경비노동자였는데, 방 안에 꽉 찬 담배 연기가 매운 중에도 나는 경상도 태생이어서 괜히 좀 으쓱했다.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있다고 믿었던 그때,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 일부 사람들은 특정 지역 사람을 특정한 이미지로 폄훼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되는 양 자식들 결혼도 잘 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뭐가 어떻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결혼할 때가 된 자식이 연인을 소개하면 출신 지역이 어디냐고 물어 전라도라고 하면 마땅치 않아 했다. 전라도 지역에서도 경상도에 대해 같은 거부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무방비로 주입되는 편견은 의식을 지배해 그 지역 사람과 친구 맺기가 좀 꺼려졌다. 어떤 이유에선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수군수군 만들어 낸 편견에 사로잡힌 한 시절이었다.
경비노동자의 딸인 우리 자매는 국민학교를 마치자마자 2세대 노동자가 되었다. 둘째 딸인 나는 두어 개 공장을 거쳐 언니가 다니던 공장에 입사했을 때 노동조합을 만났다. 무지의 각막을 한 꺼풀 벗으며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계기였다. 걸핏하면 수배되고 끌려가던 노조 지부장은 조합원 교육 시간에 열정적으로 강의했다.
“조합원 여러분! 사장이 경상도 사람이면 경상도 노동자 착취하지 않고, 사장이 전라도 사람이면 전라도 노동자 착취하지 않습니까? 지역감정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음모와 편견입니다. 노동자는 어느 지역, 어떤 공장에 있더라도 똑같은 노동자입니다.”
깨금발을 딛고 세상을 두리번거리던 나에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일한 공장이 사돈의 팔촌으로 연결되는 씨줄을 통해 특정 지역 노동자들로 채우는 식이었다면, 1977년 원풍모방에 내가 입사한 수단은 언니가 채용 담당 관리자에게 선물인지 뇌물인지를 바쳐서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이런 식의 취업 거래는 실상 공공연했던 모양인데, 육십 년대에서 칠십 년대 초반 무렵엔 상상 밖의 여성 노동자 채용 형태도 있었다고 한다.
1977년 서울 원풍모방 기숙사 언덕에서 찍은 내 사진. 필자 제공 |
나는 식모살이를 해서라도 취업을 시켜달라고 거듭 고모를 졸랐다. (…) 결국 고모는 동일방직 경비계장에게 부탁하여 나는 경비계장이 소개해 준 친척 집에서 아기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6개월을 아기를 돌보아 준 후 1967년 9월20일 꿈에 그리던 동일방직에 입사할 수 있었다.
‘어둠의 시대 불꽃이 되어’ 162쪽, 70년대민주노동운동동지회 엮음, 학민사, 2021
공장장의 처형네로 식모살이를 갔다. (…)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부엌 시렁(선반) 위에 계란 바구니가 있는데 키가 작고 어린 내가 이를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란을 위에서 꺼내 먹고 다시 담아 놓기를 반복하였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바구니를 내려 보시더니 내 손이 닿지 않은 맨 아래에 있는 오래된 계란이 깨져서 구더기가 생겼다며 어찌나 야단을 치던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돈 벌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하고 생각하며 꾹꾹 참았다가 밤에 잘 때 이불 뒤집어쓰고 실컷 울었다.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했고 가난이 싫었다. 이렇게 식모살이 1년을 하고 동일방직에 입사할 수 있었다.
‘어둠의 시대 불꽃이 되어’ 178쪽, 70년대민주노동운동동지회 엮음, 학민사, 2021
‘식모’ 노동을 제공한 후 공장에 취업할 수 있었다는 당사자들의 기록이다.
1960∼70년대, 국민학교를 겨우 마친 소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 공장을 전전했다. 대개는 작은 봉제공장이나 가발공장, 스웨터를 짜는 편직물공장 등에 보조로 들어가 밤샘 노동을 밥 먹듯이 하면서 근로기준법 같은 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일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제법 규모가 있던 동일방직은 여성들이 취업하고 싶어 하는 공장이었고 매해 신규 노동자를 뽑았지만, 이곳도 이력서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근로기준법이 정하는 취업 기준에도 못 미치는 어린 여성들의 가장 확실한 입사 전략은 관리자 집 식모로 들어가는 거였다. 시간을 정해 출퇴근을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숙식하며 아기 돌보기, 밥 짓고 빨래하기 등 갖은 허드렛일까지 맡았다. 생사여탈을 좌우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매우 종속적인 노동이었다.
70년대 산업사회가 발전하며 미혼의 여성 노동은 대부분 공장으로, 가사노동은 위탁업체를 통한 기혼여성들의 시간제 일자리로 일반화되었다. 명칭은 ‘파출부’를 거쳐 지금은 ‘가사도우미’로 바뀌었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식모’라는 명칭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의 글을 접하고 당시 사정을 잘 알 거라 짐작되는 원풍모방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선배의 말은 더 놀라웠다.
“동일방직만 그런 게 아니고 원풍도 더러 그런 경우가 있었어.”
그러니까 60년대 후반, 길게는 70년대 초까지 이런 방식의 취업 착취가 공공연히 행해졌다는 얘기다.
고용자가 법률을 무시하고 편법이나 변칙의 노동착취를 자행해도 처벌은커녕 유착하던 때다. 70년대 청계피복의 경우 12살에서 17살의 노동자가 7천여 명, 26%나 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노동법 같은 건 있는 줄도 몰랐던 이들 견습공은 시다로 불리며 하루 15시간 일을 하고 형편없는 임금을 받았다. 이 어린 노동자들에게 전태일은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는 먼 길을 걸어 다녔고 노동법 책을 들고 고군분투하다 불꽃이 되었다.
그 후 반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기술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변화 발전했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 또한 뾰족하고 가파르니 고개가 아프다.
열정페이라든가, 사회초년생의 노동이 불합리하게 이용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안이 저당 잡혀 임금을 떼먹히거나 존엄을 침해당하는 노동환경이 반세기 전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소년공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고 기관차를 운행하던 노동자가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노동 현장의 재해나 사망이 근절되지 않는 핵심을 정확히 진단하며 근본적인 대책을 강하게 지시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았다. 새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최근에도 수조 배관 작업하던 노동자들이 질식해 죽고 벌목 중이던 노동자가 깔려 죽고 건설 현장 로프가 끊어져 죽고 심야 배송하다 죽고, 죽고 있다. 사람보다 이윤이 앞선 작업장에서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은 끝이 없고 여전히 매일 보는 뉴스는 불안하고 우울하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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