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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3 (화)

    [김진영의 자작나무 숲] ‘우아한 퇴장’을 위한 마음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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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년 퇴직…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셰익스피어 말도 있지만

    ‘좋은 끝’은 연연해하지 않는 담박한 작별, 삶의 끝도 그러하리

    송년의 이 계절에 35년 재직한 대학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다. 그 교실, 그 학생들, 그 분위기에서 하는 수업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내친김에 5년 넘게 지속해온 ‘자작나무 숲’ 지면도 닫기로 했다. 스스로 끝내는 느낌, 자발적 마무리의 의지 같은 것을 위해서다.

    기분이 어떠세요? 시원섭섭하지요? 주위에서들 묻고 답한다. 떠나는 쪽은 대부분 아무 실감이 없고, 떠나보내는 쪽에서 오히려 말이 길다. 그동안의 수고를 치하하고, 정년을 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며 치켜세우고, 덕담도 좀 보태고, 그러면서 아마 속으로는 시원할 테다. 시어머니가(또는 적이) 사라졌다! 드디어 우리 세상이다!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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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년병 교수들의 단톡방 이름이 놀랍게도 ‘머니 토크(money talk)’라는 얘기를 들었다. 신입 시절부터 그렇게 집단 무장하면, 은퇴할 때까지 다들 재테크에 성공할 것이라 본다. 퇴임하는 교수들 관심사도 다르지 않다. 만나면 머니 토크다. 온 나라가 취업난, 민생고로 허덕이는 마당에 송구스럽지만, 은퇴의 실감은 오랜 세월 아지트였던 연구실에서 짐을 뺀 후, 또박또박 받아오던 월급이 뚝 끊기는 순간 밀려든다고 했다. 낭만주의 시인 푸시킨의 원고에서 빚 계산한 숫자들을 발견하고 웃었던 때가 떠오른다. 위대한 시인도 노상 돈 생각했다.

    직종 직급 불문, 단순 연금 생활자들의 공통된 걱정이 그것이다. 그 걱정은 품위 있는 여생에 대한 불안과 맞닿아 있는데, 가만히 보면, 불안의 요인이 돈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돈이 품위를 지켜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품위가 돈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결국 이 불안은 어느 날 갑자기 잉여의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에게 어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인생 제2막이라 불리는 국면에서는 지금껏 의탁해 온 공적 요새가 아닌 사적 울타리가 필요하다. 몸과 정신을 위해 경제 자립은 기본이고, 생활의 일정한 자율 체계가 요구된다.

    교수였던 사람은 어떤 형태로건 공부를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 문학을 전공한 사람은, 가장 쉽게는 번역을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삶으로 자신의 남은 나날을 덮어쓰는 방식인데, 일종의 문학적 도 닦기에 해당한다. 학회에서 원로는 대개 기조 강연을 하거나 사회를 보는 것이 통례지만, 계급장 떼고 일반 세션에 등장해 후속 세대와 나란히 논문 발표하는 것도 신선해 보인다. 물론 학문과 전혀 무관한 영역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전원생활로 전환하거나, 북 카페를 열거나, 지역 봉사를 하거나, 요리책을 쓰거나, 문화 가이드를 하거나... 어쩌면 다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돈도 벌고 싶은데, 그건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그러나 정말로 하고 싶은 건, 이거다. 그레이스풀 엔딩(Graceful Ending). 우아한 마무리, 우아한 퇴장 등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만사 끝이 중요하고 어렵다. 글 한 편 쓸 때도 방점은 마지막 문장에 찍힌다. 그것이 여운이고, 여운이 감동이다. 하물며 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삶의 소설’에서랴. “끝이 좋으면 다 좋아요. 끝이 승리의 화관이죠. 과정이 어떠했든, 남는 건 끝이에요.” 셰익스피어 희극에 나오는 대사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All’s well that ends well). 승부는 맨 마지막에 판가름 나는 것이니, 그때까지 두고 보라는 말로 들린다. 굳은 결의와 희망과 인내심의 선포와도 같다. 셰익스피어의 여주인공은 그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원하던 남자를 남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레이스풀 엔딩 역시 ‘좋은 끝’이다. 그러나 결이 좀 다르다. 이건 승부수 얘기가 아니다. 어떻게 끝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끝맺는가가 핵심이다. 과연 무엇이 좋은 끝인가의 본질을 묻는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끝맺음은 어느 정도 선택이 가능하다. 가치와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레이스풀 엔딩의 조건은 하나, 나는 맡은 바를 다했으니 이제 너의 길을 축복한다는 선의의 다짐이다. 연연해하지 않는 담박한 작별이다. 아쉽게도 모든 소임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지는 않는다. 인정받지 못한 헛수고가 있고,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적지 않다. 그런데 끝은 어김없이 온다. 삶의 마지막이 바로 그러할 것이다. 이 마지막은 그 마지막의 전주곡이다.

    그러니 이것은 마음의 자세라고밖에 볼 수 없다. “네게 자리를 내주마/ 이제 내가 썩고 네가 꽃피울 차례다.” 서른 살 푸시킨의 이 시구는 자식을 향한 유언도, 소명을 다한 자족감의 과시도 아니었다. 언제나 외롭게 분투했기에, 그는 항상 준비하고 연습해야만 했다. 그것이 진짜 ‘좋은 끝’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았던 거다. 나는 이제서야 그 연습을 시작했다.

    ‘김진영의 자작나무 숲’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과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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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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