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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3 (화)

    [문소영 논설위원이 간다] 더이상 천만 영화에 목매지 말고 스토리 R&D에 투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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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 더 암울한 한국 영화, 침체 벗어날 길은



    중앙일보

    문소영 논설위원


    지난달 열린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가수 화사(안혜진)와 배우 박정민의 축하 공연 퍼포먼스가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정작 영화보다 축하 공연에 더 공을 들인 기획을 두고 분노·탄식하는 영화 관계자와 애호가도 적지 않았다. 청룡영화제 1주일 뒤 영화 리뷰 유튜버 ‘엉준’(여준혁·40)이 올린 ‘천박한 한국 영화 시상식 수준’ 영상이 한 달 만에 217만 조회수를 기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OTT 확산으로 극장 관객 급감

    극장 영화, 집 영화로 취향 분화

    애니 경시하다 미·일에 안방

    국산 ‘퇴마록’ 불씨 살린 건 위안

    안일한 기획, 예술성 집착도 문제

    스태프 홀대하는 문화 바꿔야

    스태프 시상 실종된 청룡영화제

    중앙일보

    영화 전문 유튜버 엉준(여준혁)이 지난달 청룡영화제 시상식에 대해 ‘기술 스태프를 홀대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영상은 217만 뷰를 기록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사진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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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씨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대목은 시상식 무대에 감독과 배우만 올리고, 각본상을 비롯해 촬영조명·미술·편집·기술·음악 등 핵심 스태프 시상을 영상으로 대체해 순식간에 처리했다는 점이다. 후보 스태프들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고 후보작 포스터가 잠깐 지나간 뒤 곧바로 수상자 인터뷰 영상이 이어졌다. 전체가 5~6분에 불과했는데, 축하공연에 할애한 25~30분과 비교하면 현저히 짧다. 각본과 기술 스태프 후보를 일일이 호명하고 각 부문의 역할과 가치를 위트 있게 설명하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대조적이다.

    해당 영상에는 1만2000개에 달하는 댓글이 달렸고, 상당수는 격한 공감이었다. “한국의 유구한 전통인 기술직 무시하기. 이러니 케데헌 같은 작품도 못 만들지” “이러면서 한국 영화 살려야 한다고?” “한국 영화는 자연사 중” 같은 반응이 쏟아졌다. 여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특정 시상식 하나만을 비난하려 한 게 아니라, 기술 스태프를 천대하고 기술 개발에 관심이 없는 한국 영화계 전반에 대한 불만을 다소 거칠게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타워즈’ ‘블레이드 러너’의 미니어처, ‘쥬라기 공원’의 CG, ‘아바타’의 모션 캡처, 과거 홍콩영화의 와이어 액션처럼 “특수한 기술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사례가 적지 않은데 한국엔 그런 영화가 있었나”라고 반문했다.

    요즘 유튜브와 소셜미디어엔 ‘한국 영화 망하는 중’이라는 제목의 영상과 글이 넘친다. 과장이 섞였더라도 통계를 보면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팬데믹 이후에도 1년에 한두 편은 나오던 1000만 관객 영화는 올해 자취를 감췄다. 그나마 500만 관객을 넘긴 한국 영화도 ‘좀비딸’ 하나뿐이다(표 참고). 2025년 한국 영화 관객은 12월 중순 기준 4256만 명으로, 연말까지 집계해도 지난해 7147만 명에 크게 못 미칠 전망이다.

    물론 넷플릭스 등 OTT 확산으로 극장을 찾는 관객 자체가 줄어든 영향도 있다. 그러나 2025년 한국 영화 시장점유율 역시 하락해 2010년 이후 최저인 43.7%를 기록하고 있다. 17일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 불과 재’가 지난 주말 174만 관객을 모은 흐름을 고려하면 최종 점유율은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2026년이 더 암울할 수 있다는 업계의 전망이다. 올해까지는 팬데믹 이전 제작돼 개봉을 미뤄온 작품들이 재고처럼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상당 부분 소진됐다. 신규 투자는 부진한데 내년엔 극장에 걸 영화 자체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CJ ENM 등 주요 투자·배급사도 아직 2026년 라인업을 발표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서울 시내 한 영화관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주토피아2’ 광고판. 이 애니는 21일 올해 국내 개봉작 중 처음으로 6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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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OTT 때문에 모든 영화가 망한 게 아니라, OTT 때문에 사람들이 ‘돈 내고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와 ‘집에서 봐도 될 영화’를 더 명확히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많은 한국 영화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OTT에 익숙해진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오려면 “단순 관람을 넘어선 감각적 체험을 첨단 기술로 제공하는 영화”이거나, 혹은 “팬덤이 탄탄해 극장 관람 자체가 팬심의 표현이 되는 영화”여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흥행작을 보면 이 경향이 선명하다. ‘F1 더 무비’는 전자에, ‘귀멸의 칼날’ ‘체인소 맨’ 극장판은 후자에 가깝다. ‘주토피아2’나 ‘아바타’ 3부작은 두 요소를 동시에 갖춘 경우로 볼 수 있다.

    ‘케데헌’ 소니 기술력 세계적

    특히 올해 미국·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 박스오피스를 지배한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극장 개봉작은 아니지만 올해 전 세계적 화제작으로 꼽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역시 애니메이션이다. 기자가 확인한 해외 유튜버들의 리뷰에선 K팝과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뿐 아니라, 작품의 애니메이션 기술 자체를 찬탄하는 반응이 유독 많았다. 제작사인 소니 픽처스(소니그룹의 미국 자회사)의 애니 기술이 디즈니·픽사를 위협할 수준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반면 국내 반응은 K팝과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에 쏠려, 기술 논의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이 대목에서 조영신 미디어랩 C&X CEO가 한국콘텐츠진흥원 ‘N콘텐츠 매거진’에 기고한 글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케데헌’ 성공을 두고 “글로벌 콘텐트 전략에서 애니메이션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아쉬움에 씁쓸하다”고 했고, 애니메이션의 국경을 넘는 압도적 장점을 강조했다. 실사영화와 달리 배우의 인종·언어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 적고, 초현실적 설정을 관객이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캐릭터가 늙지 않아 장기 프랜차이즈화가 가능하고, 이를 기반으로 굿즈·게임·테마파크 등 IP 비즈니스가 무한 확장된다는 논리다. 그는 “한국은 웹툰이 실사 드라마·영화로 이어지는 IP 확장 공식은 완성됐지만, 가장 중요한 중간 다리인 애니메이션이 외면받았다”며 ‘스위트홈’ ‘무빙’ 같은 사례는 “실사보다 애니메이션에서 상상력이 더 극대화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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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의 베스트셀러 오컬트 판타지 소설을 바탕으로 한 ‘퇴마록’. 한국 애니로서 모처럼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다만 50만 관객을 모아 손익분기점(100만 관객) 달성에는 실패했다. [사진 로커스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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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준혁씨도 “청룡영화상이든 백상예술대상이든 애니메이션 부문이 없을 정도로 한국은 애니를 경시한다”며 “창의성과 기술이 극대화될 수 있는 매체가 애니메이션”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애니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로는 “애니는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편견, 인재의 웹툰·게임 쏠림, 열악한 노동환경, 흥행 성공 사례의 부족”을 들었다. 다만 그는 올해 나온 ‘퇴마록’이나 ‘나쁜 계집애: 달려라 하니’처럼 원작이 있는 애니 시도에서 제작사들의 비전이 보인다며 기대를 표했다. 정 평론가도 애니메이션 ‘퇴마록’의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고 평가했다.

    영화계에는 조폭·권력 비리·항일·남북관계만 반복하며 특정 정치적 이념에 치우치다 보니 한국 영화가 매력을 잃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거대 시스템과 싸워 이기는 서사가 더 강한 카타르시스를 주다 보니 창작자들이 매력을 느꼈고, 그 성공 공식을 몇 년간 과도하게 반복하는 패턴이 굳어졌다는 것이다.

    여씨는 “팬데믹 이전 한국에선 영화가 가장 접근이 쉬운 놀이 문화였고, 티켓이 상대적으로 싸니 작품의 질과 무관하게 ‘가볍게 보고 이야깃거리로 소비’되는 문화가 오래 지속됐다”며 제작·투자가 ‘적당히 유행하는 트렌드’ ‘적당히 좋은 배우’ ‘적당한 투자’를 뭉뚱그려 굴러가던 구조를 지적했다. 그러나 OTT 시대가 오면서 그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됐고, 티켓 값 인상까지 겹쳐 관객의 기준이 더 엄격해졌다는 것이다.

    예술성 약하다고 지원 제외

    그는 또 한국 영화가 한편으로는 상업성이 빼어나지도 못하면서, 다른 한편에선 학교와 지원 기관이 비현실적으로 예술성만 강조하는 이중 구조도 문제라고 봤다. “영화과 재학생들에게 댓글이나 메일을 받는데, 학교와 교수진이 장르적 개발보다 예술적 소양을 기르는 데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는 얘기가 많다”고 했다. 이어 “최근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는데, 넷플릭스에 올라온 해외 다큐처럼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다큐를 시도하고 싶어도 영화진흥위원회 지원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지원을 받기 어렵다고 하더라”며 “이런 분위기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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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법은 있을까. 지금까지의 관행, 판이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정덕현 평론가는 “올해는 천만 관객 영화 시대가 저물면서 오히려 연상호 감독의 ‘얼굴’,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 같은 좋은 소규모 영화들이 눈에 띄었다. 이제 제작사들은 천만 관객 영화에 목매지 말고 좋은 백만 관객 영화를 만드는 것에 집중할 때다”라고 진단했다. 여씨는 무엇보다 ‘스토리 R&D’ 투자를 강조했다. 한국은 감독이 각본까지 쓰는 경우가 많고, 회사가 작가를 월급제로 고용해 꾸준히 아이템을 개발하는 시스템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시나리오가 덜 다듬어진 채 촬영에 들어가는 ‘주먹구구식’ 관행을 바꾸고, 아이템을 축적한 뒤 적기에 캐스팅·제작·개봉으로 이어지는 개발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대형사든 신생사든 스토리 R&D에 투자한다면 1~2년 사이 다시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소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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