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A. 호프만의 1820년대 자화상. 위키피디아 |
(이어서) 1808년 ‘운명’의 그날, 베토벤의 마라톤 콘서트장에 저명 비평가 E.T.A 호프만(Hoffmann, 1776~ 1822)도 있었다. 그 역시 그날 공연에서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아니, 극장 환경과 연주자들의 기량이 너무 부실해서 초연 작품들의 진정한 가치와 깊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 쾨니히스베르크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호프만은 베를린 항소법원 판사 겸 사법 관료라는 본업보다 여러 편의 동화와 소설을 쓴 작가로, 또 오페라와 실내악 등을 만든 작곡가 겸 음악 비평가로 유명했다.
그 시대의 음악 비평, 특히 초연 작품에 대한 비평은 공연 감상평이 아니라 악보를 분석해 음악적 구성과 미학적 가치를 평가하는 경향이 주류였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악보는 알려진 바 1809년 말~1810년 초 출간됐다.
호프만은 1810년 7월 독일 저명 음악저널(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에 교향곡 5번에 대한 비평을 발표했다. 훗날 자신의 에세이집에 ‘베토벤의 기악 음악’이란 제목으로 재수록한 그 글에서 그는, 당시 별다른 주목을 못 받던 교향곡 ‘운명’이야말로 “낭만주의 음악의 정수”라고 단언했다. “이 경이로운 작품은 끊임없이 고조되는 클라이맥스 속에서 청자를 얼마나 단호하게 무한의 정신세계로 인도하는가! 사려 깊은 청취자의 영혼은 형언할 수 없는, 불온한 갈망과도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깊고도 친밀하게 요동치게 될 것이며, 마지막 화음에 이르러-사실 그 이후까지- 하릴없이 넋조차 잃게 될 것이다.”
거의 평생 오스트리아 빈을 벗어나지 않은 베토벤과 베를린 등 독일 북부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호프만은, 알려진 바 실제로 만났거나 사적 친분을 맺은 적이 없었다. 호프만이 베토벤에게 편지를 썼다는 기록은 있지만, 베토벤이 답장을 했는지도 알려진 바 없다. 당연히 호프만은 베토벤이 감당하던 시련과 절망도 알지 못했겠지만, 그의 비평은 작품이 아닌 베토벤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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