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죽음은 철저히 개별적이다. 누구와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았는지, 어떤 상처와 기쁨을 안고 떠났는지에 따라 죽음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오랜 투병 끝에 준비된 죽음과 갑작스러운 사고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부모의 죽음과 친구의 죽음, 동거인의 죽음과 법적 가족이 아닌 사람의 죽음은 같은 슬픔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상주’ ‘직계가족’ ‘조문객’이라는 정해진 역할 속에서 애도의 주체를 제한해왔다. 혈연과 혼인 중심의 가족 제도는 애도의 공식 주체를 규정해왔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삶은 이미 그 경계를 넘어 있다. 친구, 연인, 공동체 동료, 돌봄 관계로 얽힌 사람들 혹은 함께 살았으나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 이들은 장례식장에서는 주변인이 되고, 애도는 사적인 몫으로 밀려난다. 애도할 수 없는 슬픔, 이름 붙일 수 없는 상실은 그렇게 남는다.
애도는 단순히 슬픔을 참아내는 일이 아니다. 떠난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정리하고, 자신의 삶을 재배치하는 시간이다. 어떤 이는 울음으로, 어떤 이는 글로, 어떤 이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애도한다. 애도에는 정답도, 일정도 없다. 애도는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 자신에게 가능한 방식으로 해야 한다. 공적 제도는 이를 관리하거나 통제하기보다 다양한 애도의 방식이 존재할 수 있도록 공간과 시간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족이 아니어도 애도할 수 있고, 장례식장이 아니어도 추모할 수 있으며, 일정 기간이 지나도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등장하는 작은 장례, 사전 장례식, 공동체 추모 모임, 생전 애도와 같은 시도들은 이런 변화를 예고한다.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효율과 속도, 비용으로 정리되는 죽음이 아니라 관계와 기억, 돌봄으로 품어지는 죽음. 새로운 애도문화는 죽음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삶을 끝까지 존중하기 위한 것이다.
공동체적 애도는 거창한 형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함께 살았던 동네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 사이에서 각자의 언어와 방식으로 기억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함께 준비하고, 떠난 이후에도 그 사람의 흔적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남은 이들의 삶 역시 다시 정렬된다. 애도는 그렇게 개인의 회복을 넘어, 공동체를 다시 엮는 힘이 된다.
김수동 탄탄주택협동조합 이사장 |
김수동 탄탄주택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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