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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6 (금)

    [청계광장]조용한 자본 이탈과 정부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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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니투데이

    노진호 경제평론가




    2020년 말 1100원이던 달러당 원화의 교환비율이 최근 한때 1480원을 돌파했다. 조금 과장하면 약 5년 만에 달러 대비 원화의 가치가 반 토막 났다. 변동환율 제도하에서 환율이 상승하면 경상수지 흑자로 외화공급이 증가해 환율은 다시 하락압력을 받는다. 하지만 요즘엔 이런 자동조절 메커니즘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우선 금리차에 의한 자본유출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오랫동안 한국 금리는 미국보다 높은 수준이었지만 코로나19 이후 미 연방준비제도의 공격적 금리인상 여파로 한미의 시장금리가 역전됐다. 이론상 미국 채권투자를 위한 내국인의 외화수요가 늘어나 환율이 상승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다만 통계상으로는 금리차 역전에도 불구하고 내국인의 해외 채권 순매수보다 외국인의 국내 채권 순매수가 더 늘었다. 이 부분은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생산성 둔화에 의한 원화의 구매력 감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한국의 노동생산성 증가속도는 주요 수출 대상국인 미국보다 낮아졌다. 한국의 주요 교역 상대국인 중국,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등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 '발라사-새뮤얼슨효과'(Balassa-Samuelson Effect)에 따르면 생산성 상승은 장기적으로 임금과 서비스 가격을 높이고 동시에 통화의 실질 구매력을 늘린다. 생산성 하락은 그 반대로 작용한다. 무역 상대국보다 낮은 한국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원화의 구매력 감소, 즉 환율의 구조적인 상승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세 번째는 생산성 둔화와 수출구조에서 기인한 자본이탈이다. 올해 11월에 발간된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수출의 70%가 전자, 기계, 자동차, 화학제품 등 소수 상품군에 집중되고 상품수출의 85%는 자본재와 중간재로 구성됐다. 서비스 수출비중은 15%로 낮다. 한국의 수출 대상국은 미국, 중국, 베트남 등 일부 국가에 편중됐으며 해외 직접투자도 이들 지역에 집중됐다. 즉 한국이 중간재를 수출하기 위해 소수 해외 거점에 대규모 공장을 짓고 여기에 금융업 등이 따라가는 조용한 자본이탈이 진행 중이다. 2010년대 들어 내국인의 해외 직접투자는 외국인의 국내 직접투자를 크게 앞지르기 시작했고 코로나19 이후 그 격차는 더 확대됐다. 게다가 내국인의 해외 주식투자와 외국인의 국내 주식투자의 불균형 역시 커지면서 자본의 해외 순유출과 환율상승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환율의 빠른 상승에도 불구하고 외화부채 구조는 안정적이다. 올해 9월 말 기준으로 대외 순금융자산은 플러스 1조1000억달러고 대외 금융부채 1조7000억달러 중 단기채무 비중은 약 9%다. 따라서 당장 외환위기를 걱정하기보다 특정 상품과 지역에 편중돼 글로벌 수요충격과 지정학적 리스크에 취약한 수출구조, 부족한 서비스 수출 등의 개선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제한된 시간에 '정답'을 효율적으로 많이 맞히는데 중점을 두는 교육과 시험제도를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고 상상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도 무형자산의 창조와 수출 다양화, 서비스 수출증가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산업과 무역의 구조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 외환시장 개입과 비전 없는 단기규제는 위험할 수 있다. 한국은행이 돈(원화 표시 통화)을 풀어 환율이 상승한다는 오해 역시 정책실패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으므로 적극적인 해명이 필요하다. 한국은행은 돈을 퍼주는 기관이 아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국제수지가 균형이라 가정할 때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제로로 내리고 국채를 무제한 매입해 지급준비금을 확대해도 은행대출이나 재정지출이 없으면 통화량은 늘지 않는다. 그리고 원화가치 하락은 통화량 증가가 부동산 등의 자산가격만 올리고 생산능력 증가로 이어지지 못할 때 발생한다.

    노진호 경제평론가·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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