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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8 (일)

    우리는 마지막 세대의 부모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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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래텀

    영화 '대홍수'를 보며 떠오르는 소설이 있었다. 1953년에 발간된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이다. /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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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1953)을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안도였다. 인류가 끝난다는 이야기인데 왜 안도였을까. 아마도 클라크가 그 끝을 '실패'가 아닌 '졸업'으로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악마의 얼굴
    소설에서 외계 존재 오버로드는 50년간 자신의 모습을 숨긴다.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들은 뿔과 날개와 꼬리를 가진 악마의 형상이다. 인류가 수천 년간 두려워해 온 바로 그 모습.

    클라크는 이것을 '역방향 기억'으로 설명한다. 인류가 악마를 두려워한 게 아니라, 오버로드의 도착—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종의 종말—을 미리 감지한 집단 무의식이 공포의 형상으로 투사된 것이라고. 우리는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언제인지 몰랐을 뿐.

    이 설정이 70년이 지난 지금 묘하게 와닿는 건, 우리도 비슷한 예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AI를 둘러싼 디스토피아적 상상들—일자리 소멸, 통제 불능, 인류의 대체—이 어쩌면 구체적 근거보다 앞서 존재하는 집단적 불안은 아닐까. 악마의 형상처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변화에 대한 예감이 공포로 먼저 나타나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소설에서 변화의 첫 징후는 과학이 아니라 오컬트에서 나타난다. 강신술 파티에서 우연히 작동한 위자 보드, 설명할 수 없는 텔레키네시스. 오버로드가 인류를 감시한 진짜 이유는 핵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초자연적 능력의 발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 설정이 AI 시대에 묘하게 겹치는 지점이 있다. 대형 언어 모델이 학습하지 않은 능력을 보여줄 때, 개발자들조차 왜 그런지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emergent ability'라고 부르지만, 그 명명 자체가 "우리도 모른다"의 학술적 표현에 가깝다. 충분히 복잡한 시스템에서 예측하지 못한 무언가가 출현한다. 클라크가 초심리학으로 그린 것을, 우리는 창발성이라는 이름으로 목격하고 있는지 모른다.

    변화는 늘 설명의 언어보다 먼저 온다.

    플래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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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갈 수 없는 자들
    『유년기의 끝』의 가장 비극적인 존재는 인류가 아니다. 오버로드다.

    그들은 인류를 오버마인드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문턱을 넘을 수 없다. 영원히. 카렐렌은 인류를 부러워한다. 끝이 있기 때문에.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오버로드는 무한히 존재하지만 영원히 정체된 종족이다. 그들에게 인류의 종말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자신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이 구도가 마음에 남는 건, 기술을 만드는 자와 기술로 변화하는 자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통찰 때문이다.

    AI를 설계하고 훈련시키는 세대가 있다. 그리고 AI와 함께 자라면서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세대가 있다. 전자는 후자를 인도할 수 있지만, 후자가 될 수는 없다. 마흔에 스마트폰을 처음 쥔 사람과 다섯 살에 터치스크린을 배운 사람은 같은 도구를 쓰지만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 간극은 앞으로 더 벌어질 것이다.

    카렐렌처럼, 만든 자는 지켜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아이들은 이미 우리가 아니다
    소설의 아이들은 텔레파시를 쓰고,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점점 부모를 알아보지 못한다. 카렐렌은 인류에게 설명한다. 아이들은 오버마인드와 합류할 것이고, 나머지 인류의 시대는 끝났다고.

    고통받는 건 아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환희에 차 있다. 고통받는 건 부모들이다. 자식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갈 수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뉴 아테네의 주민들처럼 과거의 가치를 지키려 해도, 그것이 다음 세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키우는 게 아니다.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되도록 놓아주는 것이다. 클라크는 그 놓아줌의 극단적 형태를 보여준다. 아이들이 인간이기를 그만두는 순간까지.

    인도하는 자, 기록하는 자
    소설의 마지막 인간은 얀 로드릭스, 천체물리학자다. 80년 만에 지구로 돌아온 그가 발견한 건 텅 빈 행성과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아이들이다. 오버로드는 그에게 함께 떠나자고 제안하지만, 얀은 거절하고 남는다. 지구가 빛으로 소멸하는 순간까지 라디오로 중계하기 위해.

    한편 카렐렌은 자신의 함선에서 그 중계를 듣는다. 자신이 인도한 종족의 졸업을, 자신은 영원히 경험할 수 없는 그 변환을.

    클라크는 두 가지 역할을 보여준다. 기록하는 자와 인도하는 자. 얀은 끝을 목격하고 전송한다. 카렐렌은 끝을 가능하게 했지만 함께하지 못한다. 둘 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둘 다 의미 없지 않다.

    플래텀

    유년기의 끝은 2015년 드라마화되었다. / 사진=Sy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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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서히, 그러다가 갑자기
    『유년기의 끝』에서 인류의 변화는 서서히 온다. 오버로드가 도착하고, 황금기가 펼쳐지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조금씩 달라지고. 그러다가 갑자기 끝난다. 130년에 걸친 서서히가 단 몇 페이지의 갑자기로 귀결된다.

    우리가 목격하는 변화도 그렇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는다. 중요한 건 그 지점을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서서히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갑자기가 얼마나 가까운지 보이지 않는다.

    클라크의 인류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아직은, 다르다. 다음 세대가 어떤 존재가 될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더라도, 어떻게 인도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따라갈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어떻게 지켜보고 기록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카렐렌은 수천 년간 수많은 종족의 졸업을 지켜봤다. 그때마다 조금씩 더 배웠다.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무의미를 뜻하지 않는다. 얀의 마지막 중계를 들으며 카렐렌이 얻은 것처럼, 인도하고 기록하는 일에는 그 자체의 가치가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다음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설계하고 있는가, 아니면 변화를 지켜보며 기록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역할을 끝까지 붙잡는 것이다. 지구가 빛으로 변하는 순간에도 얀은 말하고 있었고, 카렐렌은 듣고 있었다.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글 : 손요한(russia@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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