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혼모노’에선 허영의 맛인 맥주
원래는 아내를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맛
오크통 숙성 와인 맥주 ‘듀체스 드 부르고뉴’
진한 산미·과실 향의 단맛 은은해
26일 서울 광화문 음식점 ‘블루메쯔’의 ‘듀체스 드 부르고뉴’ 맥주/박성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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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명의 회원들은 대부분 김곤이 즐겨 마신다는 듀체스 드 부르고뉴를 마시고 있었다. 나 역시 듀체스 드 부르고뉴를 시킨 뒤,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옆에 앉았다.”(성해나 소설집 ‘혼모노’ 中)
올해 출간된 소설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예스24)인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창비)에는 특별한 맥주가 나온다. 이 책의 문을 여는 단편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유명 영화감독 김곤을 추종하는 팬클럽 이야기다. 세계적 영화제에서 상도 받은 김곤은 사실 아동 학대를 저지른 감독. 팬들에겐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영화판에서 그럴 수도 있지”라며 듀체스 드 부르고뉴를 다 같이 마신다. 윤리적 모순을 묻어둔 채 그의 취향까지 따라 마시는 장면은 언뜻 음산하기까지 하다. 팬들끼리는 ‘코어팬’ ‘라이트팬’을 나눈다. 코어팬이라면 이른바 ‘시네필’(영화애호가)스러운 현학적인 화법은 기본. 듀체스 드 부르고뉴라는 생경한 맥주도 익숙한듯 안주 없이 마신다.
'블루메쯔'의 안주와 '듀체스 드 부르고뉴' 맥주. 레드와인 같은 맛과 향 덕에 붉은 육류·치즈와 잘 어울린다./박성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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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체스 드 부르고뉴는 벨기에의 레드 에일 맥주다. ‘플란다스의 개’로 유명한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에서 만든다. 일반 맥주와는 색도 맛도 딴판이다. 한 입 마시면 와인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 ‘와인 맥주’라고도 불린다. 도수는 6.2도. 발효된 보리와 밀을 와인처럼 오크통에 숙성시키면서 과실 향이 풍부해졌다.
플랑드르 지역의 역사적 인물이 라벨에 그려져 있다. 맥주 이름(부르고뉴 공작부인)이 지칭하는 비운의 상속녀 ‘마리’다. 아버지인 부르고뉴 공국 샤를 공작이 전사하며 마리는 어린 나이에 막대한 영지를 상속받는다. 주변 강국들이 영지를 뺏으려 거세게 압박했고 마리는 이 상황을 타개하려 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합스부르크 가문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한다.
/박성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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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략 결혼이었지만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마리는 25세에 매 사냥을 나갔다가 셋째 아이를 뱃속에 품은 채 낙마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맥주 라벨 속 마리의 손에 그려진 새가 매다.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를 평생 그리워했다. 죽을 때도 자신을 마리의 묘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몸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한 오스트리아 지역에 남았지만 그의 심장은 플랑드르 마리의 묘에 함께 안치됐다.
이 맥주가 흔한 편은 아니다. 서울에서 벨기에 음식점 찾기는 더 어렵다. 벨기에와 접점이 있는 독일 음식과 듀체스 부르고뉴를 파는 광화문 음식점 ‘블루메쯔’를 찾았다. 짙은 붉은빛 사이로 맥주 기포가 살살 피어오른다. 혀에 닿자마자 번뜩이는 산미가 인상적이다. 오크통이 빚어낸 체리·포도 같은 과일 향이 풍부하게 담겼다. 레드와인 같은 느낌 덕에 붉은 육류·치즈와 잘 어울린다. 맥주의 여운엔 이야기들이 넘실대는 듯하다. 시고 떫은 여운은 김곤을 향한 삐딱한 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은은하게 감도는 단맛은 마리를 향한 사랑을 겹쳐 놓는다.
'듀체스 드 부르고뉴' 맥주와 블루메쯔의 슈바인학센/박성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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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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