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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3 (토)

    순수하게 질주하는 붉은 말… 속도보다 중요한 건 달리는 행위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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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丙午年, 말을 말하다

    [병오년, 숨 가쁘지만 순정하게 달리는 말처럼 아름답게]

    말이 해변을 달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고삐도 안장도 없이 철썩이는 파도를 곁에 둔 채 바닷바람을 가르며 전력으로 달리는 말의 모습에 넋을 빼앗겼다. 아름다움의 속성을 모두 모아놓은 것 같았다. 힘, 속도, 유연함, 우아함, 그리고 달린다는 사실 그 자체 외에 어떤 의도도 느껴지지 않는 무목적성까지. 말의 질주는 순정했다.

    2026년은 병오(丙午)년으로 ‘붉은 말의 해’다. ‘불의 기운이 가장 강해지는 해’, ‘에너지가 극단에 이르는 해’로 풀이된다. 붉은 갈기를 휘날리며 내달리는 말의 모습을 떠올리면, 2026년 우리는 각자의 무기를 들고 다짜고짜 ‘돌격, 앞으로!’ 해야 할 것 같다.

    나한테는 어떤 무기가 있나 방을 둘러본다. 키보드가 눈에 띈다. 그런데 이건 공격용보다 방어용에 가깝지 않나? 아, 키보드 워리어! 하지만 그러기엔 나는 심장이 약하고 너무 소심한데…. 실제 지난 병오년마다 전 세계를 뒤흔드는 큰 사건들이 발생했다. 우연이길 바라지만 뜨겁게 달아오르는 해라면 공격이든 방어든 대비하고 준비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말은 달릴 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머뭇거림이 전혀 없다. 목을 곧추세운 채 뒷발로 땅을 밀어내고 앞발로 땅을 끌어당기면서 돌진한다. 오로지 앞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생명체. 문명사에서 소와 말의 운명이 그렇게 나뉘었다. 정주하는 소와 이주하는 말. 문명의 깊이는 소가 만들었고, 문명의 넓이는 말이 확장했다.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와 서부 개척 시대 등에 등장하는 말의 모습은 활기차고 저돌적이다. 말 등에 올라탄 인간의 운명도 이와 비슷했다.

    병오년은 앞지르고 뛰어넘고 가로지르는 해가 될 수 있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한 채 뒤돌아보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세차게 달려 나가는. 여러 자기계발서도 분산된 에너지를 하나에 집중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고 말처럼 내달리는 맹목성이 인간에게 권장할 만한 미덕인지는 잘 모르겠다.

    제주도에 가면 ‘마레숲(말의 숲)’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버려진 말들의 보호 센터 역할을 하는데, 주로 은퇴한 경주마들이 그곳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경주마들은 보통 2~5세 때 가장 빠르다. 저 나이대가 지나면 경주에서 물러난 후 승마나 번식, 전시용 말로 살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식용으로 도축된다.

    ‘마레숲’에서 남은 삶을 여유롭게 보내는 말들을 보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 애틋함 속에는 앞만 보고 전속력으로 내달린 말의 운명에 대한 비애가 포함돼 있었다. 더군다나 구제된 말보다 그렇지 못한 말이 훨씬 많으리라는 것은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인간은 말처럼 빨리 달릴 수 없다. 같은 인간 사이에서도 달리는 속도는 제각각이고, 나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넘쳐난다. 대개의 우리는 나를 앞질러 달리는 인간의 뒤통수를 바라봐야만 한다. 속도의 경쟁에서 시상대는 아주 높지만 그만큼 좁다. 속도의 경쟁은 우리를 끊임없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한다.

    최근 유행하는 러닝 문화를 다룬 기사에서 개와 말과 인간의 달리기 경주에서 인간이 이길 수 있는 조건에 관해 쓴 내용을 읽었다. 그 조건은 뜨거운 날씨와 장거리 경주였다. 이유는 다른 포유류와 달리 인간은 털이 적고 피부 곳곳에 땀 분비선이 있어 열 방출이 쉽고, 다리 근육에 피로를 잘 견디는 지근섬유가 다량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빨리 달리기보다 오래달리기에 특화된 종족이다.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으면서 달릴 때 우리는 더 오래, 결과적으로는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빨리 달리고, 오래 달리는 것보다 더 좋은 건 달리기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말의 아름다움은 그때 폭발했다.

    /김기창 소설가

    [말띠 소설가·2025 동인문학상 수상자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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