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조제핀 드 보아르네
그녀는 그저 ‘나폴레옹의 여인’일 뿐이었을까
사랑·권력 규칙을 깨우치고 살아남은 유혹자
나폴레옹 “늘 거짓말…다만 늘 우아하게 처리”
안드레아 아피아니, 조제핀(일부 확대), 1808,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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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그녀는 사교계의 ‘별’
프랑수아 제라르, 조제핀의 초상, 1801, 캔버스에 유채, 178x174cm, 에르미타주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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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보아르네 부인은 눈웃음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도톰한 이마와 갸름한 뺨, 긴장감을 품은 채 뻗어가는 목선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미소를 지을 때는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이는 가느다란 손목을 드러내는 한편, 약간 큰 코와 상한 치아를 감추기 위한 습관이었다. 표정은 순간마다 다채로웠다. 중저음의 목소리와 살짝 이국적인 투 또한 매력을 끌어올렸다. 보아르네 부인이 프랑스 사교계의 별로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당시 정권의 유력자인 폴 바라스를 애인으로 두고 있었다. 아울러 장군과 정치가 등 힘깨나 쓰는 이들과도 끈끈한 연을 맺고 있었다.
그런 보아르네 부인에게 호감을 품은 이가 있었다.
애인 바라스의 이 말. 그 까다로운 실력자의 호의적인 평가 또한 흥미로웠다.
‘촌스러운’ 사내의 정체
앙투안 장 그로, 아르콜 다리 위의 나폴레옹, 1796년경, 캔버스에 유채, 134x104cm, 예르미타시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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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어느덧 그의 공격적인 미소에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집에 가고, 침실과 삶의 장막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래. 때마침 바라스와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이 남자로 인해 일상, 이를 넘어 남은 일생이 통째로 소용돌이치게 될 줄은.
“…친애하는 바라스. 그런데, 그 코르시카 군인의 정확한 이름이 뭐였죠? 그의 발음이 썩 좋지 않아 끝까지 듣지 못했어요.”
“약간 복잡하지. 이탈리아식 본명은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 프랑스 발음으로 하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정도가 될 거야.”
①피에르 폴 프뤼동 : 조제핀 황후
피에르 폴 프뤼동, 조제핀 황후, 1805, 캔버스에 유채, 244x179cm, 루브르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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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도 날카로운 눈, 길고 높은 코, 진하지만 얇은 입술.
고전적 미인상으로 볼 수는 없지만, 특유의 강한 인상은 스쳐가듯 봐도 기억에 남을 법하다. 이곳은 어슴푸레한 공기가 감도는 숲속이다. 여인은 이끼가 올라온 바위에 몸을 느긋하게 기대고 있다. 살결이 드러나는 금실 드레스의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살짝 내린다. 붉은색 캐시미어 숄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린다. 이런 배경에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화폭 한가운데에서 야성과 우아함이 함께 풍겨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피에르 폴 프뤼동의 그림, <조제핀 황후>다.
그녀가 곧 그녀이기에 그렇다. 그러니까, 보아르네 부인이 곧 황후 조제핀이 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마주했을 때 그녀는 이런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저 가녀리지도 않고, 마냥 단호하지도 않았다. 깊은 사연을 품고 있는 한편, ‘허락된’ 이가 아니면 이에 대해 털끝만큼도 알 수 없을 듯했다. 그녀는 나폴레옹이 이유 없이 빠져든 여인이 아니었다.
‘별’와 과거와 뒤편
데이비드 윌키, 조제핀과 점쟁이, 1837, 캔버스에 유채, 211x158cm,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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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르네 부인, 즉 조제핀은 1763년 프랑스 왕국 마르티니크에서 출생했다.
일각에선 그녀가 세인트루시아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을 말하기도 한다. 조제핀의 친가는 원래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집안이었다. 사정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극악의 허리케인을 맞아 사업에 타격을 입는다. 조제핀은 이때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집안에 도움을 줘야 할 처지가 됐다. 방법은 있었다. 혼인이었다. 돈 많은 명문가 아들과 식을 올려 양가 사이 관계를 이어주는 일이었다. 조제핀은 이를 해낼 수 있었다. 부자 귀족 출신의 청년 장교와 예물을 주고받는 데 성공한 것이다(여기에는 그녀 고모의 역할도 컸다). 남편의 이름은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그녀에게 ‘보아르네 부인’이라는 호칭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녀의 당시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조제핀은 이 덕에 파리에서 재차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같이 있다보니 아이도 둘이나 낳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은 기대만큼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은 바람둥이였다. 어린 아내를 함부로 대하고, 무턱대고 본인과 자식 사이 친자 관계를 의심할 만큼 막 나가는 면도 보였다.
결국 둘은 별거를 택해야 했다.
조제핀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훗날 사교계에서 꽃 피우게 될 예절은 여기서 보고 배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수도원에는 조제핀 말고도 자기 발로 나오거나 쫓겨난 귀족 여성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다. 숨죽이며 살아도 불안했을 조제핀의 남편은 결국 혁명 세력의 눈 밖에 나 1794년, 처형장에 끌려갔다. 그렇다면 조제핀은? 그녀도 함께 엮여 감옥에 갇혔다. 조제핀 또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풀려난 건 혁명의 광풍이 제풀에 지쳐 사그라든 덕이었다. 그녀 입장에선 천운이었다.
“머리를 먼저 쓰고, 그 다음 마음을 썼다”
피르맹(피르민) 마소, 조제핀, 1812, 캔버스에 유채, 74x66cm, 에르미타주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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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핀은 기적적으로 바깥 빛을 볼 수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무엇도 없어보였다. 두 자식을 둔 과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 삶인 듯도 했다. 하지만, 조제핀은 맥없이 흘러가려는 삶에 몸을 띄우지 않기로 한다. 그녀는 사교계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무기는 개성있는 외모였다. 그녀에게는 웃어야 할 때 웃고, 울어야 할 때 울 수 있는 눈치도 있었다. 성공과 몰락, 결혼과 죽음, 감금과 해방…. 온갖 일을 다 겪은 그녀의 몸 안에는 어느덧 노련해진 야수가 발톱을 핥고 있었다. 조제핀은 수도원에서 익혔을 고급스러운 몸가짐, 직전 옥살이를 하는 동안 가까워진 귀족 여인과의 인맥 또한 활용했다. 그녀가 손쉽게 사교계 스타로 오를 수 있던 이유였다.
조제핀이 그곳에서 찾는 건 야심가였다.
본인조차도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거대한 야망을 품은 이였다. 그래야만 자신과 자식을 모두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에. 바라스 등 여러 유력 인사를 거느리고 있던 그녀가 나폴레옹에게 눈길을 준 건 이 때문이었다.
조제핀은 연인을 택할 때
머리를 먼저 쓰고, 그다음 마음을 썼다. 그녀의 전기 작가인 캐롤리 에릭슨의 평가였다. 재차 언급하지만, 그녀는 결코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 ‘편지’
엇갈리는 사랑의 속도
안드레아 아피아니, 조제핀을 비너스로 묘사한 초상화, 1796, 캔버스에 유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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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핀과 나폴레옹의 사랑은 나란히 걷지 않았다.
언제나 한 쪽이 앞서거나, 어느 한쪽이 제멋대로 멈추거나, 남겨진 한쪽이 뒤늦게 따라가는 식이었다. 그런 만큼 둘 사이 관계는 처음에는 애절했고, 중반 이후부터는 조마조마했으며, 맨 끝에 이르러선 서글퍼졌다. 둘은 1796년에 사실상 약식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조제핀은 서른셋, 나폴레옹은 스물일곱이었다. 차이는 여섯살이었다. 이들은 조제핀의 나이를 줄이는 식으로 세월차를 한 살로 줄였다.
운명에. 조제핀은 결혼 선물로 이런 글이 쓰인 보석 반지를 받았다고 한다(정확한 시점에 대해선 일부 이견도 있다). 그녀가 ‘조제핀’으로 불린 건 이쯤부터였다. 조제핀은 나폴레옹이 만든 애칭이었다. 이는 과거 ‘보아르네 부인’이라는 호칭을 얻기 전 그녀의 본명, 마리 조제프 로제 타셰 드 라 파제리에서 따왔을 터였다.
사실, 이때만 해도 조제핀은 나폴레옹에게 시큰둥했다.
그녀는 아직 나폴레옹을 믿지 못했다. 나폴레옹보다 믿는 건 언제 만개할지 모를 그의 야망과 잠재력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조제핀은 나폴레옹이 곧 타지로 원정길에 올랐을 때부터 바람을 피웠다. 그녀 입장에서 이는 일종의 보험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연전연승의 나폴레옹은 천막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들뜬 기분이 뒤집히는 소문을 들어야 했다. 그 패턴은 끊이지 않고 거듭 되풀이됐다. 오죽하면 “당신만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장악할 수 있다”며 매달렸던 그녀와 이혼할 생각까지 했을까.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러지 못했다. 실은 조제핀이 나폴레옹을 택했듯, 나폴레옹도 수많은 여자 중 조제핀을 택한 것이었다. 물론 사랑의 감정도 흘러넘칠 듯 크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복잡한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조제핀만 머리를 굴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폴레옹의 뱃속에도 늙은 여우가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계산은 치열하게 이어졌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황좌에 앉은 나폴레옹, 1806, 캔버스에 유채, 260x163cm, 파리 군사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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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역시나 위험한 야심가였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국가 원수가 될 꿈을 꾸고 있었다. 나라의 으뜸 가는 황제에 오를 욕망도 솔솔 피워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의 신들린 전쟁술은 그를 조국의 가장 높은 곳으로 착실하게 이끄는 분위기였다. …내게 민심이 몰리고 있다. 내게는 노련한 군단도 있다. 이대로 간다면 역사의 강물은 나를 제1통령의 자리, 아울러 국왕과 황제의 관까지 실어 나르리라. 본인도 이를 알고 있었다.
프랑수아 제라르, 대관식 의상을 입은 조제핀, 1807~1808, 캔버스에 유채, 214x160.5cm, 퐁텐블로 성 국립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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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촌뜨기 군인인 줄 알았던 그는 보기보다 더 냉철했다.
나폴레옹은 지금껏 조제핀의 인맥을 출세에 활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투박한 인상을 조제핀의 품위로 희석한 순간도 적지 않았다. 나폴레옹에게는 아직 조제핀이 필요했다. 이혼의 충동을 참은 건 이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조제핀이 뒤늦게 울면서 사죄한 일 또한 큰 영향을 미치기는 했다. 이쯤부터 둘 사이 사랑의 관계도가 바뀌었다. 조제핀은 나폴레옹을 한 남자로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또한 조제핀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만, 두 진지함의 온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조제핀은 점점 뜨거워졌고, 나폴레옹은 서서히 차가워졌다. 여자는 사랑의 환상에 빠지고 있었고, 남자는 그 환상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②자크 루이 다비드 :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1805~1807, 캔버스에 유채, 621x979cm, 루브르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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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마침내 1804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스스로 황제의 관을 썼다.
이어 곁에 선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얹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만큼 이 장면을 웅장하게 묘사한 그림은 없을 것이다. 황금 월계관을 쓴 채 왕관을 든 이가 나폴레옹,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는 이가 조제핀이다. 이들 뒤에선 교황 비오 7세가 축복의 뜻에서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지아가 살짝 왼쪽의 귀빈석에서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일부 확대), 1805~1807, 캔버스에 유채, 621x979cm, 루브르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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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이날 대관식은 그림 속 장면처럼 깔끔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실제로는 어머니 레티지아가 불참했다. 일정과 의전 문제 등을 언급하긴 했지만, 핵심 이유는 조제핀이었을 것이다. 레티지아는 조제핀을 싫어했다. 여기에도 이유야 여럿 있었다. 시어머니 입장에선 그녀의 화려한 외모, 헤픈 씀씀이, 능숙한 말솜씨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도 문제였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서 조제핀은 20대처럼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40대를 넘긴 상태였다. …그렇다면 후사는? 대를 이을 자손이 생기지 않으면, 결국에는 죽 쒀서 남 주는 꼴 아닌가? 레티지아의 큰 염려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분명 ‘승리의 부인’이었지만…
헤롤드 피퍼드, 나폴레옹과 조제핀, 19~20세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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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드 빅투아르(승리의 부인)’.
조제핀은 어느덧 사교계 유력 인사부터 병사들에게까지 이런 말로도 불리고 있었다. 이 별명이 뜻하는 건 크게 세 가지다. 하나, 조제핀이 민중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것. 둘, 나폴레옹 또한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었다는 것. 셋, 둘 사이에선 여전히 시너지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 조제핀은 이제 나폴레옹에게 몸과 마음을 다 내주고 있었다. 그녀에겐 지성이 있었다. 남자에게 교태와 성깔을 번갈아 내보일 줄도 알았다. 나폴레옹 또한 기본적으로는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노력’까지 하는 그녀를,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아예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돌아본 적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제핀은 슬슬 사치를 즐기는 면도 보인다. 그녀는 옷과 장갑, 장신구와 신발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한 해에만 몇백 벌, 몇백 켤레를 쓸어 담았다고도 한다. 오죽하면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도 (나폴레옹조차 모르는)감당하기 힘든 빚을 졌다는 말도 돌 지경이었다. 원래도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었지만, 이는 본인의 뿌리 깊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을 것이다.
앙리 프레데릭 쇼팽, 조제핀의 이혼, 1843, 캔버스에 유채, 55.8x80.5cm, 월리스 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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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사이 조제핀의 목을 서서히 조이는 게 있었다.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짚은 그 문제, 자식 건이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옵소서. 조제핀은 매일 밤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아이는 좀처럼 생기질 않았다. 조제핀만 급해졌을까. 나폴레옹 또한 조급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합법적 후계자를 얻는 일. 이는 공든 제국을 지키기 위해선 반드시 행해야 할 과제였다. “나라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조제핀은 결국 나폴레옹에게 ‘혼인 무효’ 통보를 받는다. 조제핀은 끝까지 못 들은 척을 하려고 했다. 나폴레옹이 그녀 귀에 대고 다시 말하자 아예 졸도하는 척 연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대는 누구도 아닌 나폴레옹이었다. 돌이킬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1810년, 둘은 그렇게 관계의 마침표를 찍었다. 어느 젊은 날 서둘러 행한 결혼은, 이처럼 허무하리만큼 쉽게 쪼개졌다. 옛 결혼 선물, ‘운명에’가 새겨진 보석 반지? 그 운명이란 건 제국의 후계라는 명분 앞에서 힘없이 조각날 뿐이었다. 결혼 기간은 14년이었다.
사랑과 권력의 속성을 알고
헥터 비거, 말메종에서 알렉산더 1세를 맞이하는 조제핀, 1864, 패널에 유채, 50x70cm, 말메종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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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핀은 말메종 궁전 등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조제핀은 황후의 관을 내려놓았다. 그때부터는 과거에 매달리는 일을 포기했다. 조제핀은 더는 소란을 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싸움에선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질 수밖에 없는 투쟁에선 오래 버틸수록 손해라는 점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러자 세상이 또 그녀를 돌아봐주기 시작한다. 어느덧 조제핀은 동시대에 ‘살아남은’ 사람 중 나폴레옹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돼있었다. 나폴레옹은 나이가 찰수록 눈에 띄게 고독을 호소했다. 그는 결혼 무효 후 곧장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 대공녀와 식을 올렸다. 얼마 뒤에는 아들도 봤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여전히 조제핀을 그리워했다. 그녀에게 돈을 보내주고, 어떤 때는 산더미 같은 빚도 대신 갚아줬다. 그녀를 위해 글을 쓰고, 그녀가 머무는 방을 찾아 새로 얻은 그 아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조제핀이)언제나 나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이런 말을 했다는 설도 있다.
아돌프 노던,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1851, 캔버스에 유채, 120x95cm, 위치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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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은 결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전쟁 귀신으로 불린 나폴레옹의 기세도 러시아가 품은 동토 위에서 꺾이기 시작한다. 나폴레옹은 몇 번의 치명적인 오판을 한다. 아울러 이보다 몇 배나 큰 불운에도 짓눌린다. 쌓아올리기는 어렵지만 단박에 무너뜨리기에 가장 쉬운 건 사실 탑도, 제국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일 것이다. 내몰린 나폴레옹이 유배지로 보내진 곳은 엘바섬이었다. 하지만, 조제핀은 과거의 조제핀이 아니었다. 앞서 젊은 시절 조제핀은 혁명의 광풍에 맥없이 함께 휩쓸렸다. 하지만 어느덧 중년이 된 조제핀은, 이와 비슷한 전쟁의 소용돌이 틈에서도 고고하게 등허리를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살아남기 위해 갈고닦은 처세술 덕분이었다. 몰락한 건 나폴레옹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
“보나파르트, 엘바, 로마왕…”
기욤 기용 레티에르, 조제핀, 1807, 캔버스에 유채, 225x149cm, 베르사유 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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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조제핀에게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1814년 5월, 그녀는 갑자기 오한을 느낀다. 단순한 열병인가 했지만, 열과 떨림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폐렴이었다. 결국 5월29일,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만다. 이때 나이는 쉰한 살이었다. “보나파르트, 엘바, 로마왕….” 전설처럼 여겨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가 남긴 유언은 이런 문장이었다고도 한다. 다만, 이 설이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죽음 소식을 유배지에서 전해 듣고선, 이틀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는데….”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조제핀을 그저 위대했던 사람으로 칭하기는 어렵다.
현명한 황후였다고 보기에도 부족하고, 탁월한 전략가 내지 조언자로 칭하기도 어색하다. 하지만, 그녀가 역사적인 격동의 시대에서 사랑과 권력의 규칙을 읽어낸 흔치 않은 인간이었다는 것. 이는 확실하다. 그녀는 시대를 바꾸지 못했지만, 시대가 그토록 맹렬하게 바뀌는 와중에도 본인을 지킬 수 있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 삶이었다.
삶에 있어 중요한 건 생존 아닌가. 어떤 면에서는, 그녀는 말 그대로 누구보다도 ‘마담 드 빅투아르’의 생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을지.
참고 자료
Carolly Erickson, The Secret Life of Josephine: Napoleon‘s Bird of Paradise, St. Martin’s Press
Knapton, Ernest John, Empress Josephine. Harvard University Press
주경철,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휴머니스트
프랭크 매클린, 나폴레옹, 교양인
기자의 말풍선
지난해 8월에 나폴레옹을 먼저 다루고(2024년 8월24일자, “보정 해도 너무했다” 늠름한 초상화의 충격적 진실…실상은 어땠나했더니), 근 4개월 만에 조제핀을 씁니다.
독자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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