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몽유도원>에서 왕 여경(무대 뒤편 왼쪽)과 도미가 도원 부족민의 운명을 두고 내기 바둑을 두는 장면. 에이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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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빛줄기가 궁궐의 기둥과 보를 길게 훑는다. 무대는 순식간에 대국의 자리로 전환되고, 왕 여경과 도미가 마주 앉는다. 돌을 놓는 것은 두 사람이지만, 그 수를 몸으로 풀어내는 것은 무대 전면을 가득 채운 앙상블. 흑과 백의 의상을 입은 이들이 화점 위에 나누어 서면, 여경과 도미 그리고 아랑의 운명이 걸린 내기 바둑이 시작된다. “검은 점 하나/ 목숨을 건 한 수/ 고요함이 출렁이고/ 숨이 섞인다” 낮게 뻗어가는 도미의 흑. “깊숙한 그곳에 돌을 던져/ 빈틈을 노려서 파고 들어” 퍼지고 뛰어오르는 여경의 백. 흑과 백이 어지럽게 뒤엉키다 도미의 결정적 패착의 순간에 음악이 멈춘다. “이 바둑은 나의 승리다.”(여경)
뮤지컬 <몽유도원>은 최인호 작가의 소설 <몽유도원도>를 원작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 부부 설화’를 무대로 옮겼다. <명성황후>, <영웅> 등을 제작한 한국 창작 뮤지컬의 산실 에이콤이 ‘한국적 미학’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윤호진 연출이 2002년 초연 이후 24년 만에 전면적으로 손질해 다시 무대에 올렸다.
도미 부부 설화는 5세기 백제의 개로왕이 도미의 아름다운 아내 아랑을 빼앗으려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도미와 아랑이 왕의 명령을 피하려다 눈이 멀고 얼굴이 망가지는 시련을 겪지만, 끝내 해후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뮤지컬은 도미와 아랑의 지극한 사랑과 여경의 헛된 욕망을 극적으로 대조한다.
작품에선 소재 만이 아니라 무대 세트, 음악까지 ‘한국적’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들을 두루 녹여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LED 화면을 사용한 무대 디자인이다. 장치를 덜어낸 무대에서 거대한 화면은 장면마다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먹이 번지고 스미는 산수화의 질감이 무대 뒤편에 펼쳐지면, 차가운 권력의 공간인 궁궐에서 자연의 숨결이 흐르는 도원(桃源)으로 바껴 간다. 어스름한 달빛, 물 위의 윤슬, 타오르는 해까지, 화면은 공간의 정서를 빛과 색의 농담으로 조율하는 ‘움직이는 화폭’이 된다.
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모습. 에이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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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모습. 에이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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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세계관을 시각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직선으로 표현된 여경의 궁궐이 긴장과 압박이 지배하는 세계라면, 자연의 곡선으로 표현된 도미와 아랑의 도원은 흐름에 순응하는 세계로 대비된다. ‘여백의 미’를 떠올리게 하는 무대 위에 인물들의 연기와 군무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가 펼쳐진다.
동서양 악기가 함께하는 음악 역시 이러한 세계를 뒷받침한다. 오케스트라 편성을 바탕으로 리드 파트에는 대금과 피리, 스트링 파트에는 해금, 퍼커션은 서양과 국악 타악기를 함께 배치했다고 한다. 노래 역시 뮤지컬 넘버 작법을 중심으로 하되 국악의 느낌을 녹여냈다.
전반적으로 무대·영상·군무·음악·연기가 고르게 맞물린 작품이다. 한국적 미학이라는 방향성이 전 요소에 일관되게 스며들어 안정된 완성도를 보여준다. 다만 대극장 뮤지컬에서 기대하게 되는 스펙터클이나 ‘와우 포인트’와는 결이 달라, 절제된 흐름이 관객에 따라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제작진은 이 작품을 2028년 미국 브로드웨이에 선보인다는 목표도 밝혔다. 제작 단계부터 세계화를 염두에 두고 아랑을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여성으로 설정하고, 동양적 관점의 사랑 이야기로 풀어냈다고 한다. 윤호진 연출은 “1995년 <명성황후> 이후부터 늘 머릿 속에 품고 있던 숙원 사업 같은 작품”이라며 “우리의 아름다운 설화를 무대로 옮기기 위해 서사, 음악, 스펙터클이 어우러지도록 연출했다”고 말했다.
극의 마지막, 해질 녘 넓은 강가에 조각배가 떠간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도미는 피리를 불고 아랑은 노를 젓는다. “바람이 내게 물어오네/ 무엇이 그리 아팠냐고/ 나는 웃으며 대답하네/ 모든 것이 다 꿈이었다고”(도미) “달빛이 조용히 속삭이네/ 무엇을 그리 사랑했냐고/ 나는 영원히 노래하네”(아랑)
오는 22일까지 국립극장. 4월부터는 샤롯데씨어터로 옮겨 공연한다.
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모습. 에이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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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모습. 에이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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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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