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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적 내는데 10년 이상 소요…단기실적 원하는 주식시장과 충돌
지분 희석된 창업자, 장기비전 관철하기 어려운 구조
비상장 벤처에 도입된 차등의결권, 상장사까지 확대해야
기간 한정하고 위법시 소멸 조항 도입하면 부작용 막을 수 있어
[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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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등의결권, 장기 혁신 프로젝트 돕는 장치
국내에서도 조성빈 외(2019)의 ‘기관 블록홀더의 단기주의가 기업 혁신에 미치는 영향: 한국 시장 증거’는 한국 기업에서 단기 성향 기관 블록홀더의 존재가 R&D 투자 위축과 유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시장의 단기주의가 장기 혁신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간표를 조율하기 위해서는 창업자에게 장기 비전을 관철할 최소한의 방패가 필요하다. 아마존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가 한 주주서한에서 “미래 현금흐름의 장기적 극대화”와 “실패에 대한 수업료”를 강조하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투자자들은 떠나라”고까지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지분율이 희석된 한국의 바이오·딥테크 창업자에게, 베이조스처럼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딥테크·성장 섹터 창업자가 상장 이후에도 소신 있게 장기 투자를 이어갈 수 있도록, 차등의결권 제도 도입을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차등의결권은 창업자가 지분 희석 이후에도 일정 기간 지배력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단기 시장 압력과 적대적 인수합병(M&A) 리스크를 넘어서 실패 가능성이 큰 장기 혁신 프로젝트를 소신껏 추진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다.
캐나다의 기업지배구조 분야 전문가인 이반 알레르 박사의 ‘차등의결권 제도의 정당성에 관한 사례 연구’는 여러 실증 연구를 검토하며, 차등의결권 구조가 특정 산업·발전 단계에서는 단기주의를 완화하고 전략적 투자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바란·아타나소프·파르티반의 ‘차등의결권 구조와 혁신’은 재무적 제약과 경쟁 강도가 큰 산업에서 차등의결권 기업이 특허 수·질, R&D 효율성에서 단일의결권 기업보다 유의하게 높은 성과를 보인다는 점을 제시한다. 다만 이 효과는 기업공개(IPO) 이후 10년 전후 상당 부분 소멸한다는 점도 함께 보여준다. 요컨대 차등의결권은 장기 혁신형 섹터에서 단기 수익만을 추구하는 자본보다, 장기 비전과 책임을 지는 창업자에게 더 큰 발언권을 부여하는 장치다.
바이오·딥테크에 10~20년간 차등의결권 도입해야
사실 한국에는 이미 ‘차등의결권’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 다만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적용된다. 2023년 11월 17일부터 시행된 벤처기업법 개정으로,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주는 1주당 최대 10개의 의결권을 부여받는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발행 대상은 지분 30% 이상을 보유한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주로 한정되며, 그 존속 기간은 최대 10년, 상장 후에는 3년이 지나면 자동 보통주로 전환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상속·양도나 창업주의 이사직 상실 시 즉시 보통주로 환원되는 조항 역시 남용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다.
문제는 이 제도가 정작 필요한 혁신 딥테크 상장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복수의결권은 상법의 1주 1의결권 원칙을 유지한 상태에서 비상장 벤처에만 예외를 허용하는 특례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바이오·딥테크처럼 상장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자본 투입과 장기 리스크 부담이 커지는 산업 내 기업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장과 동시에 복수의결권이 짧은 시차를 두고 소멸되기 때문에, 지금 제도는 상장 직후 진짜 어려운 구간에 들어서는 순간 창업자를 무방비 상태로 내모는 격이다.
따라서 논의의 초점은 ‘차등의결권을 도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비상장 영역에서 실험 중인 차등의결권을 어떻게 상장사 영역까지 합리적으로 확장할 것인가’로 옮겨져야 한다. 비상장 벤처에 적용 중인 각종 제한(존속 기간, 양도·상속 시 소멸, 창업자 지위 상실 시 환원 등)을 기본 골격으로 하되, 상장 후 10년에서 20년 내외의 핵심 성장 기간에 한해 복수의결권을 인정하고, 그 이후에는 일몰조항에 따라 1주 1표로 자동 전환되도록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물론 차등의결권이 지배주주의 지배력 고착과 사적 편익 추구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미국 재무학자인 줄리언 아타나소프의 ‘차등의결권 구조와 기업 혁신’은 차등의결권 구조가 장기적으로 특허 수·질 등 혁신 지표를 악화시킬 수 있으며, 그 메커니즘으로 의결권 프리미엄을 통한 사적 편익 소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이 논문은 젊은 성장기 기업에서는 약한 긍정 효과가 관찰되지만, 성숙기에 접어든 기업에서는 강한 부정 효과로 돌아선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상장 후 일정 기간에 한정된 시간기준 일몰조항과 위법 행위 발생 시 즉각 소멸 조항을 결합하는 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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