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창간 106주년]
인쇄 기술·편집부터 경영·플랫폼 혁신까지
그래픽=김성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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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5일 창간한 조선일보가 걸어온 지난 106년은 혁신을 거듭해 온 역사였다. 일제강점기 민족 계몽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아 창간된 신문은 한 세기를 넘는 시간 동안 기술과 편집, 경영, 플랫폼 측면에서 무수한 혁신을 통해 신문과 방송, 인터넷을 망라하는 종합미디어그룹으로 성장했다.
1970년 2월 11일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사옥 지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공간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르릉’ 하는 기계음과 함께 윤전기가 돌며 선명한 컬러 인쇄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70년 창간 50돌을 맞은 조선일보가 국내 최초로 컬러 윤전기를 도입해 ‘한국 최초 컬러 신문’ 시대를 연 순간이었다.
◇흑백의 시대에 컬러의 세계를 보여주다
흑백 TV가 보급되며 영상(映像)의 시대가 시작된 1970년대, 조선일보는 국민에게 ‘컬러의 세계’를 선사했다. 국내 신문들이 신년 기념 컬러 지면을 만들라치면, 연말에 사전 제작한 지면을 일본에 보내 미리 인쇄한 뒤 배에 실어 오던 시절이었다.
조선일보는 일본의 두 기계 회사(이케가이·미쓰비시)를 설득해 흑백 활판과 컬러 오프셋을 겸용하는 ‘공동압동형’ 윤전기를 개발했다. 동양 최초의 이 시스템은 대성공을 거두며 일본 신문사에까지 수출됐다. 본문 활자는 흑백 윤전기, 사진과 제목은 컬러 윤전기로 찍는 일본서도 시도된 적 없는 방식이 거꾸로 수출된 것이다. 조선일보만의 ‘발상의 전환’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국내 신문들은 이후 2~5년씩 시차를 두고 컬러 대열에 합류했다.
인쇄의 혁신은 콘텐츠 혁신으로 이어졌다. 1970년 2월 시작한 조선일보 ‘세계의 명화(名畵)’ 시리즈는 미켈란젤로의 ‘도니 마돈나’,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을 전면 컬러로 소개하며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시각적 즐거움을 국민에게 선사했다. 같은 해 6월 시작된 ‘세계 10대 컬러 기행’은 아마존 오지와 실크로드의 모습을 대형 컬러 사진에 담아내며 1976년 4월까지 장기 기획으로 이어졌다.
1962년 조간 발행을 알리는 사고. 군사정부가 신문사에 조간과 석간 중 하나만 택하라고 했을 때, 조간을 택하며 ‘아침을 여는 신문’ 시대를 열었다./조선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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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여는 신문, 조간을 택하다
1962년 여름, 군사정부는 하루 두 번(조·석간) 신문을 내던 국내 신문들에 하루 한 번만 발행하는 단간제(單刊制)를 강요한다. 대부분 국내 일간지들이 석간을 선택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조간을 택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세계의 퀄리티 페이퍼(Quality Paper)는 모두 조간”이라는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이는 독자들의 생활 패턴 변화를 정확하게 읽은 결정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판 판매 비율이 높아 낮 시간부터 깔리는 석간이 유리했다. 하지만 1970년대 경제 성장과 함께 국민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읽는 경우들이 점점 많아졌다. 일찌감치 조간을 선택한 조선일보는 확실한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뉴스 내용도 독자들 일상에 필요한 교양·취미·오락 등 다각도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변했다. 당시 석간을 택했던 경쟁지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하나둘 조간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의 결정은 30년 가까이 앞서 미래를 내다본 것이었다.
◇한 세기를 이어져온 미디어 혁신의 DNA
1925년 10월 20일 조선일보 1면엔 ‘The Korea Daily News’란 제목의 영문 기사 코너가 만들어진다. 닷새 전 무기 정간에서 해제된 직후. 조선일보는 정간 사정을 영문으로 전하며 “수많은 독자 제현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영문란을 신설한다”며 이 공간이 “여론 광장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이후 ‘태평양 관계의 조선관’ ‘사회주의와 기독교’ 등 영문 기사 시리즈가 부정기적으로 실렸다. 영문 뉴스로 국내 사정을 해외에 알리는 창(窓) 역할을 시도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1924년 12월 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 동안 광화문 사옥에서 국내 최초로 ‘무선 전화 방송’을 실시했다. 민간 언론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가 아나운서로 등장했다. 조선일보 사장실에 방송실을 꾸미고, 우미관 등에 스피커를 설치해 서울 도심 전역에 ‘듣는 뉴스’를 전파했다. 우리 국민들이 경험한 최초의 라디오 방송 경험이었다. 조선일보는 3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뉴스와 음악 등을 전하는 방송을 시연했다. 뉴스를 듣기 위해 인파가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이 고출력 전파를 쏴 방해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1926년 6월 순종 장례식을 영상으로 제작해 서울에서 상영하는 등 영화라는 당시의 신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1929년 6월엔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행사 뉴스와 동영상을 필름으로 엮은 ‘조선일보 뉴―쓰’가 극장에서 상영됐고, 1938년엔 영화를 사회 교육 매체로 활용하기 위해 한국 최초의 ‘영화제’를 열었다.
1934년 7월 영·호남 지방에 큰 수해가 발생했을 때 국내 언론 최초로 비행기를 현장에 급파했다. 당시 조선일보가 촬영한 사진은 우리 국민이 하늘에서 내려다본 국토의 모습을 처음 접한 것이었다. 6·25 전쟁 중엔 통신 시설이 다 끊긴 상황에서 라디오로 외신을 직접 듣고 기사를 쓰는 ‘RP(Radio Press)통신’ 방식을 창안해 전시판 신문을 제작하며 뉴스의 맥을 이었다. 전시에 만연했던 유언비어와 선전선동에 맞서 혁신적 발상을 동원한 것이었다.것이었다.
한국 신문 최초 비행기 도입 1930년대 한국 신문 최초로 조선일보가 도입한 취재 전용 비행기 앞에 선 간부들. 오른쪽부터 방응모 사장, 신용욱 조종사, 이상호 사회부장, 김형원 편집국장./조선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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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신문에 머무르지 않았던 혁신
혁신은 지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아직 인터넷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 조선일보는 ‘속보’(Real Time News) 체제를 맨 먼저 구축했다. 1990년 8월, 데이콤(천리안) 등 공중정보통신망을 이용해 국내 종합 일간지 최초로 PC통신 단말기에 뉴스를 제공하는 ‘전자신문 조선일보’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5년에는 국내 최초의 뉴미디어 전문 회사인 ‘디지틀조선일보’를 설립했고, 같은 해 11월 인터넷 신문(chosun.com)을 열어 온라인으로 실시간 뉴스를 제공했다. 1999년 7월에는 국내 신문 사상 처음으로 인터넷상의 사진 라이브러리를 독자들에게 공개했다.
2009년 아이폰 국내 상륙으로 모바일 혁명이 일자, 조선일보는 2010년 3월 종이신문 지면을 그대로 스마트폰 화면에서 볼 수 있게 한 모바일 앱 ‘스마트 뉴스페이퍼’를 최초로 선보였다. 이는 뉴스 소비가 지면에서 모바일로 급변하는 흐름에 발 빠르게 대응한 사례다.
2007년 2월에는 미디어 간 경계를 허문 ‘크로스미디어’ 저널리즘 기획 ‘Our Asia’를 선보였다. 하나의 심층 취재 콘텐츠를 종이신문·지상파 TV·케이블 TV·위성 DMB·인터넷·휴대폰 등 다양한 플랫폼에 동시 송출한 실험으로, 신문·방송 겸영이 제한되던 당시 언론 환경에서 신문의 한계를 돌파한 사례다. 이후 조선일보는 2011년 12월 종합편성채널 ‘TV조선’ 개국으로 영상 미디어에 진출했다.
2020년엔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개발한 첨단 디지털 콘텐츠 관리 시스템 ‘아크(ARC)’를 도입했다. 텍스트부터 동영상 뉴스에 이르기까지 뉴스의 기획·제작·배포 등 생산의 전 과정을 크게 단축시켰고, 이를 통해 완성된 콘텐츠를 SNS나 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에 간편하게 전파할 수 있게 했다.
[신동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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