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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7 (토)

    [K-VIBE] 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빼앗긴 이름 '청주'의 주권(酒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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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연합뉴스

    김홍도, 주상관매도 (舟上觀梅圖, 일부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예술가에게 술은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나가게 하는 매개체다. 술은 단지 취기를 위한 음료가 아니다. 때로는 마음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감각의 결을 섬세하게 세우며, 무엇보다 '보고 듣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예술가의 곁에는 늘 술이 있었다. 조선의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는 그 사실을 한 장의 그림으로 설득한다. 제목 그대로 배 위에서 매화를 감상하는 낭만을 담고 있지만, 그 풍류의 화룡점정은 단연 선비 무릎 앞에 놓인 조촐한 '술상'에 있다.

    단원의 만년 명작으로 꼽히는 이 그림은 술기운이 어떻게 예술적 영감으로 전이되는지를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강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배가 있고, 그 안에는 벼랑 끝에 위태롭게 핀 매화를 멍하니 바라보는 노년의 선비가 앉아 있다.

    매화는 추위의 끝과 봄의 시작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겨울의 고독을 지나 봄의 기척을 먼저 받아내는 존재. 그 매화를 바라보는 선비의 눈빛에는 계절의 경계처럼 삶의 경계도 함께 스며 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열쇠처럼, 그의 앞에는 술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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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 주상관매도 (舟上觀梅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선비의 시선 끝이 아니라, 그의 앞에 놓인 작지만, 분명한 술병과 술잔이다. 김홍도는 술잔 속에 담긴 액체 자체를 세밀하게 그리진 않았지만, 인물의 느긋한 자태와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강물의 선을 통해 술이 주는 유연한 리듬감을 시각화했다. 강물의 흐름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곡선은 고집을 꺾고, 힘을 빼고, 사물의 결을 따라가는 방식이다. 술이 들어가면 인간의 마음도 조금은 곡선이 된다.

    단원은 그 곡선을 강물로 그려 보여주며, 술이 가져오는 내면의 '딱딱함'이 풀리고, 굳은 감각이 유연해지는 순간'을 화폭에 옮겨 놓았다.

    매화 향기가 강바람을 타고 배 위로 내려앉을 때, 선비는 잔을 들어 그 향기를 마신다. 단원은 정적인 산수 속에 '술상'이라는 점을 찍어 인물의 내면세계를 일깨운다. 풍경은 그냥 풍경이 아니라, 마음이 머무는 방식이 된다. 술병과 술잔이 없었다면 이 그림은 '매화를 바라보는 선비'라는 설명으로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술상이 들어오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선비는 단지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매화와 강물과 바람을 '자기 안으로 들이는 자'가 된다. 술은 그 매개다.

    이 그림 속 선비가 마셨을 것으로 추측되는, 맑고 투명한 술 청주(淸酒)를 오늘날 우리는 '약주'(藥酒)라 부른다. 말이 바뀌면 인식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면 존재의 위상도 함께 달라진다. 본래 우리 역사 속 청주(淸酒)의 위상은 드높았다.

    삼국시대 백제의 인번(仁番)이 일본에 누룩으로 술 빚는 법을 전수해 일본의 주신(酒神)으로 추앙받았을 만큼, 우리의 맑은 술 빚는 기술은 동아시아 최고의 경지에 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청주는 국가의 제례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는 고결한 술로 자리 잡았으며, 집마다 고유의 비법으로 빚어낸 가양주(家釀酒) 문화의 정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 술의 아픈 '주권'(酒權)을 마주하게 된다. 술에도 '주권'이 있다. 무엇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어떤 역사와 정체성을 그 이름에 담아낼 것인가. 본래 이 술은 맑다는 뜻의 '청주'라 불러 마땅했으나, 일제강점기 주세법의 칼날 아래 그 이름을 일본식 사케에 독점당하고 말았다.

    우리 고유의 맑은 술은 졸지에 '약주'(藥酒)라는 이름 뒤로 숨어야 했다. 이름을 잃은 존재가 겪는 상실감은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다. 정체성이 흔들리고, 자존이 흐려지고, 문화의 기억이 퇴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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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누룩과 맑은 술
    [신종근 제작 이미지]



    일제는 1909년 주세법을 공포하며 국균(麴菌, 입국)을 사용해 빚는 자기들의 사케만을 '청주'로 규정하고, 전통적인 누룩(곡자)을 사용해 빚어온 조선의 맑은 술은 의도적으로 그 범주에서 제외했다. 이는 분류의 문제를 넘어, 일본의 술을 근대적 표준으로 세우고 조선의 술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낙인찍으려는 문화적 말살 책략이었다. 제도를 통해 '정의'를 만들고, 그 정의를 통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방식. 식민지 정책의 본질은 늘 이런 식이었다. 칼과 총만이 아니라, 규정과 법 조항이 문화를 재단했다.

    결국 조선의 맑은 술은 제 이름을 빼앗긴 채 약주라는 분류 아래 묶이게 됐다. 약주는 본래 금주령이 내려졌을 때 "이것은 술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약(藥)이다"라며 잔을 들었던 우리 조상의 해학적인 저항이 담긴 이름이었으나, 식민지 치하에서는 제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서글픈 운명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이름이 가진 원래의 농담과 기지가 사라지고, 대신 억눌린 현실이 남았다. '약주'라는 단어는 고상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빼앗긴 자의 침묵이 얇게 깔려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비정상적인 분류 체계가 해방 이후 현재의 주세법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법체계에서도 전통 누룩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한 우리 술은 여전히 약주로 분류되며, 청주라는 이름은 일본식 제조 공정을 따른 술의 차지로 남아 있다.

    수백 년간 이어온 우리 술의 정체성이 법전 속에서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셈이다. '해방'이라는 말이 정치적 독립을 의미했다면, 문화적 해방은 아직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술의 이름이 조용히 증언한다.

    따라서 향후 주세법의 개정 방향은 세율의 조정만이 아닌, 우리 술의 '이름 찾기'와 '주권 회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누룩의 종류나 제조 방식에 따른 차별적 명칭 부여를 철폐하고, 우리 땅의 재료와 방식으로 빚은 맑은 술에 청주라는 이름을 당당히 돌려줘야 한다.

    그것이 단원이 붓끝으로 그려냈던 조선의 자존감을 현대의 술잔 위로 되살리는 길이다. 술의 맛을 복원하는 일만으로는 부족하다. 술을 둘러싼 언어와 제도, 기억까지 함께 복원되어야 비로소 '우리 술'이 완성된다.

    그런데도 잔 속에 담긴 그 맑은 황금빛은 여전히 고고하다. 모든 자극이 정제된 뒤 남은 '순수함의 미학'은 선비의 붓끝을 가볍게 만들고, 그 마음을 매화 향기 속으로 실어 나른다. 맑은 술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다. 탁주처럼 풍성한 질감도 없고, 증류주처럼 즉각적인 강렬함도 덜하다.

    그러나 그 대신, 가늘고 길게 남는 향이 있다. 한 모금 삼킨 뒤 입안에 남는 쌀의 단맛, 누룩의 고소함, 은근한 산미와 미세한 떫음. 그것들이 조용히 이어지며 마음을 정돈한다. 그래서 맑은 술은 풍류의 술이 된다. 한 잔은 말의 속도를 늦추고, 생각의 결을 고르게 한다.

    실제 김홍도는 술기운이 거나할 때 붓을 들어 거침없이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겼던 호방한 주객이었다. 그는 스승 강세황 등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술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술은 그에게 사치가 아니라 교류의 언어였고, 예술의 발화점이었다. 그가 마신 술이 향기로운 약주였든, 강렬한 증류주였든 중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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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잔에 담긴 황금술과 매화
    [신종근 제작 이미지]



    중요한 것은 그 술이 단원의 붓끝을 자유롭게 했고, 조선의 산천을 화폭에 옮기게 했다는 사실이다. 한 잔의 술이 한 잔의 그림이 되고, 한 장의 그림이 다시 시대의 감각을 남긴다. 그렇게 술은 문화의 순환으로 들어간다.

    이제 제 이름을 빼앗긴 채 '약주'라는 고단한 이름으로 버텨온 우리 술 한 잔을 머금고 김홍도의 필선을 따라가 보자. 벼랑 끝의 매화와 술잔 속의 향기가 하나로 섞이는 그 찰나의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린 우리 술의 자존감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름이 바뀌었다고 본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름이 돌아와야 본질도 더 빛난다. 청주라는 이름이 우리 술로서 제자리를 찾는 날, 단원의 그림 속 술상도 더 또렷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결국 좋은 술과 좋은 그림은 우리를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바다로 안내한다. 술에 취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깨어나게도 한다. 잔을 비우고 나면 무엇을 잃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지가 선명해지기도 한다. 맑은 술 한 잔이 그랬다.

    빼앗긴 이름을 되찾는 일은 과거를 붙드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문화의 좌표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좌표 위에서, 잔 속의 황금빛은 더 이상 남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우리의 이름으로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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