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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바라보는 국제정치적 리얼리즘도
AI 군사 무기화가 초래할 어두운 미래에 대한 전망도
전쟁을 롱숏 희극에 배치될 에피소드 하나로 만든다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 윤리의 기준은
175명 아이들의 죽음 위에 힘을 과시하는 자의
낄낄거리는 표정 위에 부각된 고통의
개별성 위에 있어야 한다
이들은 모두 근대성의 낙관주의가
덮어쓸 수 없는
윤리의 얼룩들이다
1.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공격으로 중동이 전화에 휩싸였다. 21세기도 4분의 1이 지나는 마당에 아직도 이런 야만적인, 노골적으로 명분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전쟁의 원인은 언제나 복합적이지만, 네타냐후와 트럼프의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가 이란 공습의 트리거라는 사실이 우리를 분노케 한다.
미사일과 폭탄을 날린 자는 태평스레 골프를 치고 희희낙락 농담을 늘어놓는데, 죄 없이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어째야 하나. 이란 남부 미나브시의 초등학생 175명이 미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했다. 교실에서 오전 수업을 받다 세상을 떠난 딸의 아버지라면 어째야 하나. 이런 참상까지 전쟁의 불가피한 피해로 용납해야 하나. 자기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외면하고 부인하는 트럼프와 백악관 스태프들의 도덕 불감증은 또 어째야 하나. 인류에 대한 범죄 행위를 서슴지 않는 자들을, 우리는 지구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해야 하나.
2.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은 클로즈업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롱숏으로 보면 희극이라고. 당장은 힘들어도 결국은 잘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이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겪어온 근대성의 경험이 축장되어 있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 경제는 지속적인 우상향 그래프를 만들어왔다. 시간이 지나면 기술은 발전하고 생활은 좋아진다. 지역마다 편차는 있지만, 발전 서사가 우리들 일상 경험의 기축이 되어 있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중동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고 국제 유가가 폭등하면서 세계 경제의 전망에도 불길한 기운이 드리워져 있다. 유가가 오르면 물가가 오르고, 대다수의 삶이 고단해질 것이다. 미친 코끼리 한 마리가 날뛰니 시장이 위태로워진 형국이다. 새로운 정부의 정책으로 활력을 얻은 한국 주식 시장의 그래프도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결국은 좋아질 거라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고, 채플린의 롱숏 희극이라는 틀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래도 되는 것일까.
채플린이 말하는 희극의 전형은 구약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가 보여준다. 지역 최고의 부자이자 덕이 크고 신앙심 깊은 사람 욥이 있었다. 하느님과 사탄이 이 훌륭한 사람을 두고 내기를 했다. 사탄이 말했다. 욥의 높은 덕성은 하느님이 준 은총 때문이다, 그를 불행하게 만들어도 여전히 신심이 변하지 않을까. 하느님이 반박하면서 내기판이 벌어졌고 그래서 재앙이 시작되었다. 하느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의 공격으로 욥은 7000마리 양과 3000마리 낙타를 잃고, 열 명의 자식이 한꺼번에 죽는 꼴을 보았다. 사탄의 두 번째 공격은 욥의 몸을 향했다. 온몸이 종기로 뒤덮여 가려움과 통증으로 고통을 받았다. 해일처럼 밀려온 절망과 고통 속에서 욥은 탄식한다. 사라져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이여.
물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죽음 같은 불행 속에서도 욥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고, 사탄과의 내기에서 이긴 하느님은 욥에게 두 배의 축복을 내린다. 몸이 회복된 것은 물론이고 양과 낙타의 숫자는 갑절이 된다. 그리고 다시 열 명의 자식을 얻는다. 그런데 다시 열 명의 자식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죄도 없이 몰살당한 세 딸과 일곱 아들은 다시 살아나야 마땅하지 않은가. 천지를 창조한 하느님의 전능한 권능이라면 그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열 남매의 숫자를 채워주는 것으로 끝난다고? 이것을 우리는 롱숏 희극, 해피엔딩으로 읽어야 할까.
3.
욥 이야기의 결말 속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기쁨과 고통의 개별성이 그것이다. 한 개체가 지닌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이 인지되지 않을 때, 욥의 3녀7남은 7000마리 양과 3000마리 낙타처럼 숫자로만 존재한다. 비극의 개별성은 클로즈업이 있어야 생겨난다. 집이 무너져 열 남매가 몰살당하던 날 그들은 식탁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고 어떤 모습으로 처참한 순간을 맞았을까. 열 자식의 이름도 용모도 성격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욥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과 영광 앞에 그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식을 그저 재산으로 취급했던 인지 박약 시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근대성의 양식인 소설은 오래전의 도덕 우화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인물의 성격을 향한 클로즈업 시선이 서사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설 이야기는 모두가 비극이라는 말인가.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거꾸로 롱숏이라고 해서 희극일 수도 없다. 두 극단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우리 삶이다. 클로즈업이 있어야 윤리가 생겨나고, 롱숏이 있어야 운명의 선이 만들어진다.
김숨의 소설 <잃어버린 사람>(2023)은 1947년 9월16일 하루에 부산에서 벌어진 일들을 담아낸다. 25부 123개의 단장이 100여명의 등장인물로 채워져 있다. 모자이크를 이루는 이야기는 태반은 당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곤경의 서사로 채워져 있다. 한반도와 일본, 중국 등지에서 힘든 일을 치르고 부산까지 흘러온 사람들 이야기이다.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많고 일본인과 중국인이 섞여 있다. 단장의 형식이므로, 디테일 없는 간결한 서사가 주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이것은 롱숏 희극에 해당하는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모자이크했으니 롱숏인 것은 맞지만 희극이라 할 수는 없다. 이야기의 낱낱이 시대적 곤경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클로즈업의 집합체이니까 비극 모음집이라 해야 할까. 소설을 읽는 독자는 21세기의 시선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렇게 말할 수도 없다. 인물의 삶을 파고드는 클로즈업의 시선은 슬픔과 고통의 섬세한 표정을 포착해낸다. 모자이크가 만들어내는 롱숏의 시선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구현한다. 이 두 시선의 복합으로 보면 슬픔과 고통이 곧 행복이 된다. 슬픔이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 그 자체가 행복이 된다는 것이다.
슬픔이 행복이라는 말은, 지상을 떠나며 삶을 돌이켜보는 존재의 시선을 떠올려야 납득이 된다. 고통과 슬픔이 묻어 있지 않은 행복이란 사람의 삶에 존재할 수 없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하다. 지상을 떠나는 넋은 말한다. 기쁨과 슬픔으로 얼룩진, 유일무이한 나의 삶 자체가 기적이자 행복이었다고. 그것이 우리가 아는 롱숏의 삶이고 소설이 포착해내는 서사의 방식이다.
4.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먼 곳의 일이라 우리에게 롱숏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국제 유가 때문에 요동치는 주식 시장을 걱정하고, 겁 많은 미친 코끼리가 또 어떤 행패를 벌일지 우려한다. 우리는 이란의 미나브에서 희생당한 초등학생 175명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한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때 그랬듯이,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사람다움이 없으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통의 개별성이 없는 곳에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 클로즈업이 있어야 고통의 개별성이 생겨나고 윤리가 말을 한다. 롱숏으로 바라보면 한 개체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신의 시선으로 보면 인류 전체는 대체 가능한 개미떼에 불과하고, 무한 우주의 시선으로 보면 미립자보다 못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롱숏으로 비약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전쟁을 바라보는 국제 정치적 리얼리즘도, 새롭게 도입된 AI의 군사 무기화가 초래할 어두운 미래에 대한 전망도, 전쟁을 롱숏 희극에 배치될 에피소드 하나로 만든다.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 윤리의 기준은 175명 아이들의 죽음 위에, 힘을 과시하는 자의 낄낄거리는 표정 위에, 클로즈업된 고통의 개별성 위에 있어야 한다. 이들은 모두 근대성의 낙관주의가 덮어쓸 수 없는 윤리의 얼룩들이다.
서영채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
서영채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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