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은 정당의 출현이나 보통선거권 같은 현대 민주주의의 변화를 예견하지 못했다. 그들이 만든 헌법은 민주주의의 확대가 아니라, 오히려 다수의 지배를 견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여성과 노예, 무산자에게는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 선거권이 확대되긴 했지만, 대통령은 여전히 선거인단이 간접선거로 선출한다. 미국이 우리 같은 직선제를 택했다면, 조지 W 부시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상원 의석의 배분도 인구 비례와 관계가 없다. 선출되지 않은 종신 대법관들이 의회의 입법권을 실질적으로 무력화할 수도 있다.
달이 지적하는 결정적 문제는 이 헌법을 개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미국의 헌법은 하원과 상원에서 각각 3분의 2, 그리고 주의회 3분의 2 이상의 동의로만 발의될 수 있고, 4분의 3 이상의 주의회 동의로만 수정될 수 있다. 평생 민주주의를 연구한 달은, 미국이 시대 변화에 따른 개헌을 못해서 민주국가로 더 발전하기가 어렵다고 자조했다.
미국처럼 대통령제를 채택한 한국에서는 개헌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 이후 한 번도 개헌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헌법 불합치 결정 11년 만에 국민투표법이 개정되면서 개헌의 물꼬가 트였다. 개헌이 급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지난 계엄에 대해 많은 이들은 왜 정기국회 진행 중인 12월3일에 그것을 시도했는지 의문을 가졌다. 국회가 계엄을 해제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이 사건에 대한 판결과 언론보도를 보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계엄의 주동자들은 주요 인물들이 국회에 모여 있어서 오히려 한꺼번에 잡아들이기 쉽다고 생각한 것 같다. 국회를 봉쇄하기만 하면 정족수에 필요한 국회의원들이 담장을 넘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일망타진’하려던 걸 막아낸 것은, 목숨을 건 국민과 담을 넘은 국회의원들이다. 만약 계엄 세력이 다른 계획을 세웠다면 어땠을까. 국회의원들이 지역구로 흩어진 상황에서 계엄군이 이들을 체포하거나 구금했다면, 국회가 계엄을 해제할 방법은 사실상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그런 계엄이 가능한 나라다. 당장 그럴 염려가 없으니 천천히 해도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식이라면, 계엄 조항에 대한 개헌은 언제 해야 할까? 최근 국회가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8.3%가 개헌에 찬성했다. ‘계엄 선포 시 국회가 승인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무효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77.5%였고, ‘국회 의결 시 계엄이 즉시 무효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데도 77.5%가 찬성했다. 소수점 이하까지 똑같을 정도로 계엄에 대한 국회통제권 강화에 국민의 의견이 압도적으로 모아질 시점은 또 언제일까.
민주화운동을 헌법 전문에 명시하자는 의견도 찬성이 반대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이번 비상계엄에 대한 헌재 판결의 많은 부분이 5·18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따랐다. 5·18 재판을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고, 과거가 현재를 구했다는 말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5·18의 최종적 결실이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1987년 민주헌법이었듯, 헌재 판결에 따른 불법계엄의 완전한 종식은 개헌일 수밖에 없다.
지난 몇년간 정치 양극화는 국민을 둘로 갈라놓았다. 계엄 직후에는 더욱 극심했다. 세 번의 대선에서 진보와 보수가 박빙이었다. 이런 국민이 불법계엄을 불가능하도록 하는 개헌에 대해서는 한마음이다. 이제 개헌은 필요하고 합의된 조항에 대해 그때그때 실용적으로 하면 된다.
1987년 헌법은 꼭 필요한 헌법이었다. 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고,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한 자랑스러운 헌법이다. 다만 그때는 인구소멸도, 지방소멸도, 기후위기도, 인공지능(AI)도 없었다. 국회 조사에서 응답자의 70.4%가 개헌이 필요한 이유로 ‘사회적 변화 및 새로운 문제에 대한 대응 필요성’을 꼽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한다. 개헌의 첫발을 떼는 것이야말로 지금 역사의 요구다.
이관후 국회입법조사처장 |
이관후 국회입법조사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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