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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9 (목)

    단종과 햄넷[정덕현의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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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승자가 쓴다지만 산자는 패자를 기억

    단종의 슬픔을 애도하는 관객 1300만 명 넘어

    셰익스피어는 아들 '햄넷' 잃고 '햄릿' 그려내

    죽음을 애도하는 예술의 역할 절절히 보여줘

    [정덕현 문화평론가] 지금껏 단종이 이토록 주목받던 시기가 있었던가. ‘단종 신드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종 앓이’, ‘단종 덕질’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그 진원지는 장항준 감독의 1000만 영화 ‘왕과 사는 남자’다. 극장 불황기에 이 영화는 무려 1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가 촉발한 것이 분명하지만 신드롬에는 사회적 이유가 덧붙는다. ‘왕과 사는 남자’의 무엇이 단종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걸까.

    이데일리

    많은 이들이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의 보기만 해도 눈물 나는 ‘슬픈 눈빛’을 꼽는 것에 동의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끝까지 자신을 지지하던 충신들이 잔혹한 고문 속에 죽어갔으며 자신 또한 유배돼 겨우 열여섯의 나이에 사사된 이 비극의 주인공을 이만큼 절절하게 재현한 배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과 허탈함, 분노, 체념과 그 안에 분명 있었을 자애로움까지 박지훈은 단종의 재현에 담았다.

    하지만 출판계에 역사서 열풍까지 불러일으킨 ‘단종 신드롬’을 들여다보면 역사의 희생자를 바라보는 보다 근본적인 애도가 깔렸다. 쿠데타의 희생자가 아닌가. 쿠데타로 인한 역사의 패자라고 해서 그 삶이 승자들보다 가치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는 정사의 기록이 지금의 대중은 불편하다. 만일 1980년대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광주를 짓밟고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그로 인해 희생된 무고한 광주 시민의 삶을 함부로 폄훼한다면 그 누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2024년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여의도로 달려간 시민의 마음도 똑같았을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이 함부로 시민의 삶을 유린하는 일이 결코 또다시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왕과 사는 남자’가 촉발한 ‘단종 신드롬’에는 예술의 방식으로 행해진 일종의 ‘애도’가 깔렸다. 권력은 어린 왕을 비극으로 내몰았고 권력의 역사는 승자의 편에 섰지만 긴 세월이 흐른 후에도 후대는 이 무고한 어린 왕의 편에 섰다. 영화는 그 아픔을 애도한다는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재해석했고 관객은 극장을 찾는 모습으로 이에 호응했다. 그래서 이 영화의 1000만 행렬은 마치 1980년대 독재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 광장에서 펼쳐지던 ‘씻김굿’ 같은 느낌을 준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와 공감을 하나로 묶어내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예술의 힘이다.

    예술이 얼마나 대단한 애도의 힘을 갖고 있는가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햄넷’을 통해서도 실감할 수 있다. ‘햄넷’은 열한 살의 나이에 사망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아들이다. 이 영화의 공동 각본가이자 동명의 소설을 쓴 매기 오파렐은 바로 이 햄넷의 사망과 ‘햄릿’이라는 비극의 탄생 사이의 연관성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 오파렐이 영감을 얻은 스티븐 그린블랫의 에세이 ‘햄넷의 죽음과 햄릿의 탄생’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아들을 잃은 셰익스피어가 어째서 ‘햄릿’이라는 세기의 명작을 탄생시키게 됐는가를 그려낸다.

    누군가의 죽음은 남겨진 자들을 고통 속에 빠뜨린다. 하물며 너무나 사랑했던 아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이 오죽할까. 물론 죽음을 마주하는 고통은 사랑하는 이를 잃는 아픔이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그 유한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체감이 더해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종교 같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을 갖기도 하고 예술의 미학적 방식을 동원해 고통을 애도하고 수용한다. 비극은 이 과정에서 탄생한다. 예술이라는 관조적 관점은 삶이 어찌할 수 없는 비극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해준다. 그래서 눈물이 나지만 동시에 웃을 수 있다. 모두가 그 아픔을 겪을 것이고 그래서 그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을 예술 체험 안에서 공유하게 함으로써 비극을 긍정하게 만든다. 극장 안에서 울고 웃는 관객들의 ‘카타르시스’가 여기서 생겨난다. ‘햄넷’에 등장하는 ‘햄릿’ 공연 무대는 바로 이 예술의 존재 이유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그 안에는 작품을 통해 아들을 애도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그것을 보며 비로소 남편의 애도 방식을 이해하게 되는 아내의 시선 그리고 나아가 한 인간의 비극을 예술의 형식으로 관객 모두가 공감함으로써 그 아픔을 나누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들어 있다.

    ‘햄넷’에서 윌리엄이 사랑에 빠진 아녜스를 처음 만나 들려준 ‘오르페우스 신화’ 역시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담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뱀에게 물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저승까지 찾아가 구해내지만 돌아보면 절대 안 된다는 조건을 지키지 못해 결국 아내를 잃게 된 오르페우스처럼 결국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비통한 운명을 담은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서 오르페우스도 또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도 영원히 살아있게 된다. 이것이 예술이 죽음이라는 비극적 운명을 가진 인간을 애도하는 방식이다.

    ‘햄릿’이라는 명작을 통해 영원히 살게 된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넷, ‘왕과 사는 남자’로 우리에게 되살아난 비운의 왕 단종처럼 예술의 기록과 기억은 죽음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이것은 유명한 극작가의 아들이나 왕 같은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고 소박하게 살았지만 저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았던 모든 이들은 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특히 꽃다운 나이에 피어나지도 못한 채 스러진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우리는 애써 기억하고 애도하려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그 안타까운 죽음마저 지워버리려 할 때마다 우리가 나서서 그런 죽음이 있었다고 애써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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