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처럼 누렸던 항행 자유의 위기…이란은 통행세 검토
자국 선박은 자국 군대가 호위하는 시대가 온다면
호르무즈 해협 앞에서 대기 중인 유조선들 |
항행의 자유 원칙에 따라 세계는 오랫동안 자유무역을 해왔고 경제·문화·인종적 교류도 활성화됐다. 지구촌 구성원들이 서로 가까워질 수 있게 만든 원칙이다. 세계 교역량의 80% 이상이 해상 운송으로 이뤄지므로, 항행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국가 간 무역은 단절되고 세계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받는다. 특히 배가 다니는 주요 길목인 5대 해협이 막히면 각국 경제는 마비될 수밖에 없다. 물동량과 경제적 중요성 등을 기준으로 5대 해협은 말라카, 호르무즈, 대만, 바브엘만데브, 파나마 해협이 꼽힌다.
이 가운데 호르무즈에 세계의 시선이 쏠려 있다. 미국과 이란 전쟁 발발 이후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막겠다고 위협하면서 사실상 봉쇄에 가까운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호르무즈는 중동산 석유가 세계로 수출되는 좁은 물길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대동맥이다. 가장 피해가 큰 쪽은 중동산 석유 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 무역 국가인 한국, 일본, 중국이다. 수입 절대액은 중국이 가장 많고, 의존도는 일본이 가장 크지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현실적으론 한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 에너지 수입 대안 경로가 부족하고 중화학공업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항행 자유는 우리나라와 같이 에너지를 수입해 공산품을 만들고 그걸 수출해 먹고사는 나라에 산소 호흡기와 같다.
이 항행의 자유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의 역할이 있다. 미국은 제2차 대전 이후 압도적 해군력을 앞세워 세계 바다의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하는 '해양 경찰' 역할을 자처해왔다. 1979년부터 항행의 자유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불법 영유권을 주장하는 나라를 압박한다. 중국이 인공섬을 짓고 남중국해를 통제하려 하자 미국이 군함을 통과시키며 바닷길을 뚫는 '항행의 자유 작전'이 대표적 사례다. 미국은 제7함대와 5함대 등을 상주시켜 말라카와 호르무즈 같은 주요 병목을 24시간 감시한다. 이는 글로벌 자유무역 체제의 안착과 에너지 수송로 안전 확보에 물적 기반이 됐고 많은 나라들이 그 혜택을 누렸다. 다만 미국은 항행 자유를 규정한 해양법을 비준하지 않은 채 독자적 항행 자유 질서를 구축해왔다.
물론 미국이 이렇게 천문학적 경비와 인력을 들여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해온 건 본질적으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해상 주도권 확보 차원이다. 자원봉사 활동이 아닌 자국 국익을 위한 행보인 건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나라들이 큰 비용과 위험을 들이지 않고 주요 바닷길을 다니며 오랜 시간 많은 이익을 누렸음을 부인하는 것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랬던 미국의 해상 전략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단독으로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던 시절은 지났다며 '수혜자 부담 원칙'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 |
특히 호르무즈 해협처럼 미국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훨씬 더 많이 활용하는 지역에 대해 '무임승차는 곧 종료된다', '더는 공짜는 없다'는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왜 당신들에게 더 중요하고 더 많이 이용하는 지역을 우리 군대만 홀로 지키느냐'는 게 미국 주장이다. 최근 호르무즈 해협을 향한 이란의 군사 위협이 강해지자 결국 미국은 주요 동맹과 이해 당사자들에게 함대를 파견하라고 공개 요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국제 정세의 흐름을 냉철히 읽을 줄 안다면, 미국의 이 같은 요구는 일회성이 아니라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란 상황을 상정하고 대응 전략을 짤 필요가 있다.
미국이 호르무즈에서 경찰 역할을 실제로 축소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안보 불안이 상존하는 이 해협을 항해하는 각국 선박들은 더 커진 위험을 감수하고 경계해야 하고, 보험료를 비롯한 각종 비용도 급상승해 상품 가격도 오르게 된다. 에너지를 필요할 때 조달하지 못할 위험도 커지니 결국 각국은 군함을 이 지역에 상시 주둔시켜야 할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함대 파견 요구에 미온적인 동맹국들의 태도에 배신감을 드러내고, 심지어 '두고 보자'는 반응마저 흘러나오는 건 향후 미국이 호르무즈 해상에서 역할 축소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키운다.
이미 이란은 이런 틈새를 파고드는 듯하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의 자국 영해를 지나가는 선박에 통행료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앞으로 각국이 호르무즈와 같은 주요 해협들에 해군을 상주시키거나 통행세를 물어야 하는 시대가 오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항행의 자유가 물과 공기처럼 거의 공짜였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걸까. 특히 우리처럼 주요 해협들이 막히면 수출과 수입 모두 마비되고 에너지 안보에 타격을 받는 나라 입장에선 더 걱정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대만해협 통과하는 미 군함의 '항행의 자유 작전' |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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