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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5 (수)

    [이상헌의 공평한 어리석음]피하지 못하는 사람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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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꽃이 터지듯 피어오르던 로마를 떠나던 날, 테헤란에는 폭탄이 쏟아졌다. 나는 간드러진 봄바람 속을 가로질러 공항으로 향했고, 다른 누군가는 폭탄이 떨어지는 두바이 공항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계절은 제시간에 도착하는데, 인간은 번번이 제정신에 도착하지 못한다.

    전쟁이 시작되면 넘쳐나는 것은 피란민만이 아니다. 말도 함께 넘쳐난다. 패권, 억지력, 안보, 자유. 텔레비전 화면 아래로 흘러가는 그 단어들은 하나같이 크고 단단하다. 마치 세상의 운명이 정말 그런 말들 사이에서 결정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말들은 한결같이 파괴와 죽음을 가리키면서도 어김없이 평화와 생존의 이름으로 발화된다. 살육을 계산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인간의 오래된 습속이다.

    전쟁의 약속은 내 가망 없는 친구의 말과도 닮았다. 약속시간에 늦는다고 재촉하면 이제 곧 내려간다고 한다. 그런데 실은 이제 겨우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다. 전쟁도 늘 그렇게 말한다. 이번 공습이면 끝날 것이라고, 이번 작전만 넘기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전쟁은 언제나 금방 끝난다며 시작되지만, 늘 너무 많은 것을 망가뜨린 뒤에야 마지못해 멈춘다. 그 점에서 인간은 참으로 한결같다.

    전쟁은 언제나 큰말보다 먼저 사람들의 몸에 닿는다. 누구는 대피 계획을 세우고, 누구는 비행기 표를 구하고, 누구는 주식시장을 확인하고 다음 수를 계산한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은 여전히 출근하고, 물건을 나르고, 누군가의 식사를 준비한다. 전쟁은 공중에서 시작되지만, 그 충격은 늘 지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몸으로 떨어진다.

    테헤란에 폭탄이 쏟아지던 때에도 여전히 사람과 세상을 잇는 사람들이 있었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길가의 구멍을 메우는 이들이 있었고, 전신주에 메달리며 끊긴 전선을 잇는 손들이 있었다. 도시는 무너지는 듯했지만, 누군가는 그 무너짐이 완전한 정지로 이어지지 않도록 제 몸으로 하루를 이어 붙이고 있었다. 전쟁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출근을 시킨다.

    두바이 같은 도시도 다르지 않다. 유리와 강철, 냉방과 조명, 매끈한 도로와 높은 빌딩은 불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포연이 드리워지는 순간 그 질서의 밑바닥이 드러난다. 그런 도시를 실제로 떠받치는 것은 대개 이주노동자들이다. 빌딩을 짓고, 방을 청소하고, 음식을 나르고, 배관을 고치고, 도로를 메우는 사람들. 도시의 럭셔리와 효율은 대개 그들의 피로 위에 조용히 놓여 있다. 한때 번영과 야심의 상징이던 높은 빌딩도, 그 순간에는 그저 위태로운 탑일 뿐이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값비싼 항공권과 전세기로 가족을 빼내지만, 누군가는 돌아갈 비용이 없고, 돌아간다 해도 고국이 더 안전하다는 보장조차 없다. 돌아간 뒤의 생계도 막막하다. 더 불안정한 삶으로의 추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전쟁은 어떤 이들에게 피신의 문제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 자리에 남아 버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피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떠나지 못한다. 전쟁은 그 차이를 잔인할 만큼 또렷하게 드러낸다.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군사력만이 아니다. 우리가 평소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동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취급해왔는가 하는 사실도 함께 드러난다. 전쟁은 그 어두운 밑바닥까지 들춰낸다. 평소에는 숙련이 낮다고 불리던 노동이, 재난이 닥치면 가장 높은 숙련과 인내를 요구받는다. 세상은 끝없이 중요한 사람들을 호명하지만, 정작 세상을 멈추지 않게 하는 이들은 늘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취급을 받는다. 코로나 때 이미 아프게 배웠던 일인데, 인간의 수업은 늘 더디다.

    문명은 늘 높이 올라가려 하지만, 전쟁은 그 높은 꿈의 실체를 너무 쉽게 폭로한다. 그것을 실제로 지탱하는 것은 언제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노동이다. 그리고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되는 것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무너진 하루를 이어 붙이는 것도 그들이다. 오늘도 하늘은 분주하다. 미사일과 드론이 부딪치고 엇갈린다. 높은 곳에서는 파괴가 계산되고, 낮은 곳에서는 그 파괴의 뒤처리가 삶의 몫으로 떨어진다. 세상을 버티게 하는 것은 바벨탑이 아니다. 피하지 못하고, 떠나지 못한 채 끝내 하루를 이어 붙이는 사람들의 손이다.

    경향신문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ILO 수석 경제학자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ILO 수석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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