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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6 (목)

    “아빠, 도롱뇽 알 찾아올게요” 그게 마지막이었다…35년째 미제로 남은 ‘개구리 소년 사건’ [오늘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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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뉴스는 지나갔지만, 그 의미는 오늘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그날’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지금을 읽습니다. <편집자주>


    서울경제

    20년 전 오늘인 2006년 3월 25일. 전 국민에게 안타까움과 충격을 안겨줬던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은 공소시효 만료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1991년 실종 이후 3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다섯 명의 아이들이 왜 산에서 돌아오지 못했는지, 누가 그들의 짧은 생을 앗아갔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건은 지금까지도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흔히 ‘개구리 소년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이름은 사실 오해에서 비롯됐다. 사건 초기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찾으려 했던 사실이 개구리를 잡으러 간 것으로 잘못 보도되면서 ‘개구리 소년’이라는 명칭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1991년 3월 26일, 다섯 아이가 실종됐다=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인 1991년 3월 26일. 5.16 군사 쿠데타 이후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선거일로 임시 공휴일이었던 그날, 대구 성서초등학교에 다니던 다섯 아이는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가겠다”며 집을 나섰다.

    우철원(13·6학년), 조호연(12·5학년), 김영규(11·4학년), 박찬인(10·3학년), 김종식(9·3학년) 등 5명은 대구 달서군 와룡산으로 향했다. 이게 가족들이 본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저녁이 돼도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부모들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고, 이 소식은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군과 경찰 등 국내 단일 실종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약 32만 명의 인력이 투입돼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다. 하지만 아이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산에서 짧은 간격으로 비명을 들었다”는 목격담만 무성할 뿐 수사는 진척 없이 세월만 흘러갔다.

    실종 11년째인 2002년 9월 26일. 와룡산 4부 능선에서 도토리를 줍던 주민에 의해 아이들은 유골로 발견됐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발견 당시 두개골에서 날카로운 도구에 의한 손상 흔적이 발견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그러나 초기 대응은 뼈아픈 실책으로 남았다. 사건 초기 경찰은 유괴 협박 전화가 없었고, 경제적 동기도 크지 않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단순 가출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초기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유골 발견 당시 현장을 보존하지 않고 훼손해 중요한 법의학적 증거가 소실됐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결국 범인의 윤곽조차 특정하지 못한 채 2006년 3월 25일 당시 15년이었던 공소시효가 만료되며 법적 처벌의 길은 막히고 말았다.

    서울경제

    ◇‘재수사’ 카드 꺼냈지만…영구 미제로 남을 가능성 높아=2019년 9월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밝혀진 것을 계기로 당시 민갑룡 경찰청장은 이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지시했다. 대구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은 현재까지도 50여 건이 넘는 제보를 검토하며 수사를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사건 해결로 이어질 만한 결정적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정현욱 대구경찰청 강력계장은 “개구리 소년 사건은 아직도 재수사 중”이라며 “그간 접수한 신고에 대해 수사했으나 특별히 단서가 될만한 내용은 확보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범인의 DNA라는 결정적 증거가 남아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달리 개구리 소년 사건은 범인의 흔적이 희미해 자칫 영구 미제로 남을 수 있다는 우려가 깊다.

    ◇사회적 변화 이끌었지만, 유족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 비극적인 사건은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실종아동 관련법과 범죄피해자구조법 제정의 기폭제가 되어 수많은 실종자를 찾는 시스템 구축에 기여했다. 영화 ‘아이들…’, 소설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 등 다양한 콘텐츠로도 재조명됐다.

    그럼에도 유족들에게 시간은 여전히 1991년 그날에 멈춰 있다. 다섯 명의 아버지는 실종 이후 11년 동안 트럭을 타고 전국을 돌며 실종 전단을 직접 배포했다. 이후에는 진상 규명 촉구, 소송 제기, 관련 법·제도 개선 등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김종식·김영규·박찬인 군의 아버지 세 명은 끝내 진실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실종 35년이 흐른 지금도 남겨진 유족들은 빛바랜 사진을 품에 안고 와룡산을 바라본다. 법적인 공소시효는 이미 끝났을지라도, 아이들을 향한 그리움과 진실을 향한 간절함에는 결코 유효기간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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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AX콘텐츠랩 기자 dorem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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