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중동에 투입되는 美육군 82공수사단 |
(서울=연합뉴스) 김종우 선임기자 = 팍스(Pax)는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지만, 순수한 평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팍스 로마나·팍스 브리타니카 등 제국이 국제질서를 장기간 관리할 때 명명된 용어다. 팍스가 붙을 수 있는 조건은 군사력, 경제 지배력, 규범 설계 능력, 동맹 네트워크 4가지다. 이 요소들이 동시에 작동할 때 팍스가 유지된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들은 폐허를 만들어 놓고 이를 평화라고 부른다"고 했다. 팍스의 이면을 꿰뚫는 말이다.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가 부상했다. 유럽과 아시아가 포화 속에 무너질 때 미국은 본토 피해 없이 산업 기반을 유지·발전시켰다. 달러는 기축통화가 됐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미국은 역외 조정자이자 세계의 경찰 역할을 맡았다. 유럽·아시아·중동, 그 어디에서도 새로운 패권이 고개를 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세계의 요충지마다 미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미국의 우산 아래 자유무역은 번성했고, 세계화는 유례없는 규모로 팽창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단극 체제가 정점에 달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미국 주도의 질서가 유지됐다.
▶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는 서서히 균열했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 1·2기를 거치며 가시화됐다. 미국은 세계 질서 유지라는 명분을 내려놓고 강대국 경쟁을 내세웠다. 동맹은 가치공동체에서 거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변화는 예고된 흐름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 칼럼니스트 월터 러셀 미드는 미국의 대외 개입을 추동한 것은 소련에 대한 공포였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냉전 종식 이후 소련이 몰락하자 개입의 정당성과 동력이 약화했고, 미국 내에서 개입주의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커졌다. 그 빈자리를 중국·러시아·이란이 파고들었다.
▶ 미국은 현재 3개의 전선(戰線)을 한꺼번에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유럽에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질서가 흔들리고, 중동에선 이란과의 군사적 충돌이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다. 아시아에선 중국의 도전이 거세다. 미국의 관리 능력이 한계에 부딪힌 형국이다. 특히 팍스의 핵심 요소인 '전쟁 억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미국 국방전략위원회는 2024년 보고서에서 "미국은 1945년 이후 가장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면서 "동시에 둘 이상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할 경우 패배할 수도 있다"는 취지로 만장일치 경고를 내렸다.
▶ 이란과의 군사적 충돌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상황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방위력 공백 우려와 파병 압박을 동시에 받고 있다. 동맹에서 얻는 안보상 이익은 줄고, 부담해야 할 비용은 늘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완전히 끝났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달러 체제는 여전히 견고하고, 군사력은 대체 불가능하다. 하지만 1990년대식 팍스 아메리카나가 저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네이버 연합뉴스 채널 구독하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