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트럼프, 벼랑 끝서 물러서 협상 모색
종전 합의해도 분쟁 근본 해결 못해
전쟁 진짜 피해자 이란국민 방치 안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토머스 셸링은 전쟁과 평화에 관한 협상에서 상대방에게 양보를 얻어낼 가능성을 높일 조건으로 “무모하거나 무리한 요구,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평판”을 제시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란의 강경파 지도자들은 이른바 ‘셸링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들은 명확히 정의된 목표나 사태를 진정시킬 전략도 없이 오직 긴장 수위를 끌어올리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이제는 벼랑 끝에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선 듯하다.
이란에 호르무즈해협 재개방에 동의하지 않으면 발전소를 초토화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최후통첩 시한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에서 극적으로 양측의 ‘치킨 게임’은 잠시 중단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동 지역 내 적대 행위를 해결하는 문제와 관련해 매우 훌륭하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는 이어 “이란의 발전소에 대한 공격을 5일간 연기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전에도 협상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다가 곧바로 태도를 바꿔 맹렬한 공격을 가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란 외무부 대변인이 종전 협상을 모색하는 메시지가 ‘우방국’을 통해 전달됐다고 공식 확인했다.
치킨 게임의 핵심은 자신이 차를 충돌시킬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상대방이 믿게 하는 데 있다. 전략가 허먼 칸이 1965년 그의 저서 ‘확전론(On Escalation)’에서 지적했듯이 치킨 게임의 필승 전략 중 하나는 운전대를 떼어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임을 보여 주는 신호다. 다만 이렇게 승리한다고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은 위험을 감수하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초래한 혼돈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려는 강력한 본능을 갖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는 벼랑 끝에 다가섰지만 미끄러져 떨어질 만큼 바짝 접근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트럼프식 전쟁 수행 방식의 문제점이다. 허세와 엄포만으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이란이 세계경제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치명적인 압박 수단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의 한계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만 위험을 불사하는 성향을 보인다. 이는 ‘타코(TACO)’로 불린다. “트럼프는 항상 꽁무니를 뺀다(Trump always chickens out)”는 조롱이 담긴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감당하기 어려운 손실에 베팅하지 말라”는 비즈니스의 원칙을 끝내 배우지 못한 것 같다는 점이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다.
미국의 평화 협상 발표 전부터 외교적 경로가 다시 열리고 있다는 징후들이 속속 포착됐다. 그중 하나는 분쟁 종식을 위해 필사적이라고 할 만큼 트럼프 대통령의 적극적인 신호였다. 그는 ‘조건 없는 항복’ 요구부터 전쟁 종료 선언, 이란 발전소 파괴 위협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부산한 행보를 보였다. 또 다른 징후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카타르와 튀르키예의 중재 노력을 은밀히 독려했다는 점이다. 카타르 당국자들은 이란이 카타르 라스라판 가스전을 공격하기 전까지 타협 조건을 모색 중이었다. 하칸 피단 튀르키예 외무장관은 잠재적인 합의 도출을 위해 미국·이란·유럽 측과 대화 중이라고 발표했다.
세 번째 신호는 이란에서 나왔다. 아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은 최근 “호르무즈해협은 봉쇄되지 않았다”며 “선박들이 항해를 주저하는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촉발한 전쟁에 대한 보험사의 두려움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는 또 “무역의 자유 없이는 항행의 자유도 존재할 수 없다”며 “둘 다 존중하거나 아니면 둘 다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번처럼 위기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거나 감내할 만한 대가를 치르고 승리를 거둘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긴장 완화는 합리적인 선택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이란 지도자들이 모색 중인 유형의 합의가 이번 분쟁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좌절될지는 몰라도 그 프로그램을 탄생시킨 악성 정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현시점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전쟁의 십자포화 속에 갇힌 사람들이다. 이란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거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던 이란 국민들은 강경 진압으로 수만 명이 숨지는 희생을 치렀다. 진정한 피해자는 평범한 이란 국민이다. 그들을 벼랑 끝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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