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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비정규직서 느낀 '헛헛함' 소설로 옮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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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국내 출간 맞아 첫 訪韓, 일본 소설가 오야마다 히로코

비정규 인생이었다. 2006년 대학 졸업 후 외주 잡지 제작 회사에 취직했다. "이따위 부정확한 글을 쓸 바에야 소설이나 쓰지그래?" 이런 힐난을 들었다. 집 앞 안경점 구인광고를 보고 거기서도 잠깐 일했고, 자동차 부속 제작 매뉴얼을 만드는 하도급 업체에서도 근무했다. 근속 기간이 10개월을 넘지 못했다. "열심히는 하는데 헛수고 같았어요. 내가 대체 뭐 하고 있나 싶더군요. 통장에 돈이 들어와도 기분이 나빴어요."

최근 소설집 '구멍' 국내 출간을 맞아 방한한 일본의 신예 소설가 오야마다 히로코(34)씨는 "당시의 근로 경험에서 느낀 '찜찜한 기분'을 소설로 옮겼다"고 말했다. 2010년 데뷔작 '공장'은 세 명의 젊은 공장 직원을 등장시켜 공장의 이끼를 연구하고, 연구 서류를 교열하고, 그 연구물을 종일 파쇄하는 무의미한 작업 과정을 통해 노동과 인간 소외를 그려낸다.

조선일보

지난 1일 만난 오야마다 히로코씨는“’이따위로 쓸 거면 때려치우고 소설이나 쓰라’고 핀잔 준 회사 선배가 지금의 남편”이라며“내 모든 소설에 제목까지 달아주는 문학적 스승”이라고 말했다.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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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파쇄 업무는 제 경험담이에요. 하루종일 기계의 손발이 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아시려나요." 소설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일류 기업이라면 변변찮은 대학 연구실보다 당연히 자금이 풍족할 테지만, 그것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면 의미 없지 않을까?' 이 소설은 2013년 '오다 사쿠노스케상'과 '히로시마 혼 대상'을 동시 수상했다.

2014년 아쿠타가와상을 안긴 표제작 '구멍'은 비정규직의 일상을 청산하고 남편 따라 시댁으로 내려온 젊은 여성의 곤란을 보여준다. 일은 그만뒀으나 새 환경에서 황망함을 떨치지 못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불가사의한 검은 짐승을 뒤따라가다 구멍에 빠진다. 그리고 그런 구멍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미국 작가가 '당신 작품에선 포위된 상태에서 도망치려는 발버둥이 느껴진다'고 하더군요. 우리 일상엔 정말로 구멍이 존재합니다. 가족이든 다른 이유든 내 인생을 나로서 살게 하지 못하게 가두는 압력 말이죠."

그는 현실에 구멍을 뚫어 환상을 섞는 작법으로 평단을 사로잡았다. "마리오 바르가스요사 등 남미 문학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김애란·이승우·편혜영·한강 같은 한국 작가들도 열심히 읽고요." 특히 해외에서 활발히 호명된다. 오스트리아·미국에서 열린 각종 문학 행사를 비롯, 지난 1일까지 개최된 '이병주 하동 국제문학제'에도 참석했다.

히로코는 이번 문학제에 '큰 세계와 개인적인 말'이라는 발제문을 발표했다. "일본에서도 소설 읽는 인구가 점점 줄고 있다… 독자들은 재밌는지 아닌지로만 판단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독자를 상정하지 않고 쓴다. "글을 쓰다 보면 의미가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반드시 말은 다음 말을 불러온다. 그처럼 살아서 이어지는 말을 찾아내 잡아둘 때 진정으로 기쁨을 느낀다."

내년에 새 단편집이 나온다. 이번 한국행을 소재로 한 소설도 집필할 계획이다. 그는 소설가가 되면서 비로소 평생직장을 찾은 것이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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